中 폭발적 인구증가문제 꿰뚫어본 선각자
中 폭발적 인구증가문제 꿰뚫어본 선각자
  • 한인희
  • 승인 2009.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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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저명한 인구 학자이자 경제학의 태두였던 마인추

마인추(馬寅初)는 1882년 6월 24일 저쟝성(浙江省)의 성시엔(嵊縣) 푸코우쩐(浦口鎭)에서 태어났다. 마인추의 ‘5개 말’과 인연이 있었는데 즉 마인추는 성이 마씨였고, 말해, 말월, 말일, 말시에 출생한 기이한 사주를 갖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 단기필마로 권력자들의 압력에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전통적으로 그의 고향 사람들은 성격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지역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중국전통 연극 중 위에쥐(越劇)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고향 성시엔은 숲이 우거져 ‘녹림호한(綠林好漢)’이 많아 ‘성시엔의 강도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의 부친은 마예썽(馬隸生)은 작은 술도가의 주인이었다. 마인추는 형제 중 다섯째로 매우 총명했다. 부친은 마인추가 가업을 잇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마인추는 부친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신식학문을 하고 싶었다. 부친은 아들 마인추가 상하이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는 소리를 듣자 채찍으로 때리면서까지 가업을 잇기를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학문에 목말라 있었다.  마침내 17살이 된 마인추는 1899년 초여름 상하이 중학교에서 신식공부를 했다. 21세였던 1903년에는 텐진(天津)의 베이양(北洋)대학 광산학과에서 공부했고, 1906년 베이양정부의 국비유학 장학생에 선발돼 미국의 명문 예일대학 광산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뒤 1년이 지나자 그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국을 구하려면 경제학을 공부해야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예일대학 경제학으로 전과해 학부를 졸업했다. 예일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마인추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저명한 셜리그만교수였다.
1915년 중국으로 돌아온 마인추는 정부의 재정분야에서 일을 했다. 그 뒤 베이징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마인추의 연구 분야는 ‘인구론’과 ‘중국 농업경제’였다. 항일전쟁 초기인 1937년 마인추는 충칭대학의 상학원원장이 됐다.
 마인추는 1940년 봄, 항일전쟁 국민당 전시 수도였던 충칭의 교외에 있는  육군대학 장교반에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자리는 100여명의 국민당의 고위 관료 장군들이 모인자리였다. 강의는 두 시간 정도로 진행됐다. 그는 강연에서 항일전쟁은 중화민족 존망이 달려 있는 결정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일전쟁 중에 ‘하등인’들이 전쟁에 참가하고, ‘중등인’들이 전쟁에 쓸 돈만 내고, ‘상등인’들은 돈도 안내고 싸우지도 않으면서 재산만 축내는 집단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그룹은 돼지와 개보다도 못한 ‘상상등인’이라고 일갈했다.
더욱이 마인추는 장제스를 ‘민족 영웅’이 아니라 ‘가족영웅’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친척들을 비호했고 그들이 ‘조세, 공채, 통화팽창’이라는 3가지 방법으로 민족의 진액을 모두 뽑아갔기 때문이다.
마인추가 지적한 ‘상상등인’은 대권을 이용해 국가의 경제 기밀을 독점하고, 외화투기를 일삼아 하루 밤사이에 떼 부자가 된 그룹이었다.
이들이 누구인가? 이른바 중국 근대 ‘4대 가문’인 장제스, 쿵상시(孔祥熙), 쑹즈원(宋子文), 첸리푸(陳立夫) 집안 사람들이었다. 마인추는 강연에서 특히 쿵상시와 쑹즈원을 지목했다. 이는 바로 최고 권력자 장제스를 비난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장제스는 그들과 인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마인추의 태도는 결국 장제스와의 원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장제스는 처음 마인추를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해외에 나가 시찰을 권유했지만 마인추는 그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장제스는 결국 마인추를 체포해 감옥에 넣었다. 이렇게 해서 회갑의 나이에 마인추는 꾸이저우(貴州)의 쓰펑(息峰)감옥에 투옥되었다. 쟝시(江西)의 샹야오(上饒)와 충칭(重慶)의 꺼뤄산(歌樂山)에서 비로소 연금이 풀리게 됐다.
1949년 10월 1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던 날 천안문광장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을 알리는 기념식이 거행됐다. 이 자리에 마인추는 마오쩌뚱의 바로 뒤에서 개국 선언을 들었다.
이후 마인추는 중앙인민정부의 상무위원, 재경위원회 주임, 저쟝(浙江) 대학총장직을 맡았고 1951년 6월에는 베이징대학 총장에 임명됐다. 이미 초로의 노인이었던 그는 신중국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의 애국 열정은 특히 ‘인구’문제에 집중됐다.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중국 인구에 대한 문제를 그는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지적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전통적으로 출생률이 높은 이유는 2천년동안 통치자들이 세금을 증액하기 위해 인구증가를 장려했으며 위대한 성인 공자(孔子)도 남자는 16세 여자는 15세에 조혼하도록 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서한시대에는 15세면 반드시 결혼하도록 했는데 이러한 관념은 이후 중국사회에서 이른바 ‘다자다복(多子多福)’이 주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됐던 근거였다.
잠시 근대 중국의 인구를 살펴보자. 1850년 청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은 4억 3천만, 이후 1949년 에는 5억 5천만이었다. 구중국의 부녀자들은 평균 7-8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그 가운데 이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는 것은 절반 정도였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 30여세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은 ‘많이 낳지만 높은 사망률’이 특징이었다. 1953년에 6억명에 달했고 4년 뒤에 6억 5천명으로 년간 증가율이 2,2%에 달했다.
마인추의 인구와 관련한 주장은 당시 ‘인민의 역량’에 몰두해 ‘대약진’을 추구하려던  마오쩌뚱과의 갈등을 겪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57년 3월 2일, 마오쩌뚱이 최고국무회의를 주제했다.
마인추는 이론가 샤오리즈(邵力子)와 함께 앞자리에 앉아 크게 떠들고 있었다. 마오쩌뚱이 주석단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들을 보고는 “당신들 또 인구문제 이야기하고 있죠!”라고 의미심장한 조크를 던졌다. 이 회의에서 마인추는 인민대표대회 대표의 자격으로 인구통제를 위한 가족계획에 대해 발언했다.
사실 1953년 중국대륙에서는 최초로 인구센서스를 실시했었다. 그 결과 1953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중국의 인구는 공식적으로 601,938,035명이었다. 그리고 매년 1,200만 명에서 1,300만 명이 증가하고 있으며 증가율이 20%에 달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마인추는 이러한 공식 발표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왜냐하면 이번 조사가 샘플식이었기 때문에 출생률에서 사망률을 빼면 실제 인구 증가율이 나타난다.
마인추가 지적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예로 당시 상하이 한곳만 증가율이 39%에 달했는데 공식 증가율이 20%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마인추는 중국인구 증가율은 매년 22%이상으로 보았고 어느 지방은 30%에 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구 증가율은 실제로 너무 높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나면 중국은 50년 이후에 26억의 인구가 될 것으로 마인추는 예측했다.
마인추는 같은 해 3월 31일 ‘중화의학회의’ 회의석상에서도 “만약 이렇게 인구가 매년 3%씩 늘어난다면 1968년의 중국 인구는 8억에 달할 것이고, 1971년에는 9억 8천만, 50년 후인 2007년에는 26억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인구를 줄이는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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