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 권력의 초라한 최후는 역사속으로…
비공식 권력의 초라한 최후는 역사속으로…
  • 한인희
  • 승인 2009.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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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조폭계 최고 우두머리 두웨성(杜月笙) (하)

 

정치적으로 확고한 지지자를 획득한 두웨성은 이제 금융분야에 진출을 꽤했다. 따라서 그는 1929년 중회은행(中匯銀行)을 설립했고 상하이의 금융계에 진출했다.
그의 은행은 상하이의 전통적인 부유한 은행가들과의 인맥으로 말미암아 크게 발전했다. 이제 두웨성은 과거 가난하고 계모로부터 구박받던 천덕꾸러기도 아니고 뒷골목의 불량배도 아니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상하이의 최고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당연히 조상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다. 그는 고향의 대규모 토지를 구매하고 두씨 집안의 사당 건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사당 낙성식에는 의장대만 5천명이 참가했다. 의장대는 프랑스조계의 두웨성 공관에서 출발했다. 위용을 보이면서 경찰의 선도차가 길을 열고 축하의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했다. 두씨 사당 낙성식은 3일 동안이나 계속 흥청거렸다.
특히 낙성식에는 최고지도자 장졔스 뿐만 아니라 상하이지역 경비사령관 쑹쓰훼이(熊式輝), 상하이시장 장췬(張群) 등 중국 국민당 요인들이 모두 편액을 보내와 축하했다.
확고부동한 자리를 확인한 두웨성은 1932년 항사(恒社)를 조직하고 명예이사장이 되었다. 이 조직은 겉으로는 민간조직처럼 활동했다. 설립취지를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상호부조와 사회봉사, 국가에 충성한다’라고 했으나 사실은 조폭조직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사회의 각계 인사들이 130여명 정도가 참여했으나 1937년에는 520여명으로 늘어나 국민당의 상하이당부, 상하이사회국, 언론계, 연예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두웨성의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1937년 7월 7일 노구교(蘆溝橋)사건으로 야기된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급전직하의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것이다. 이 해 8월에는 일본이 상하이를 공격하는 8·1사변이 발생했다.
일본인들은 두웨성을 끌어들여 중국 침략의 주구로 활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두웨성은 일본인들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는 오히려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비록 조폭세계에 몸담고 있었으나 조국의 위기 앞에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품 조달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일본 상하이를 점령하자 홍콩으로 피신하고 조폭 조직을 이용해 구호활동을 계속 전개했다. 그는 중국홍십자회의 부회장을 맡았으며, 한간(漢奸:매국노)들에 대한 암살활동도 했다. 그 가운데 일본점령하의 상하이 시장이었던 푸요옌을 암살했다.
1940년에는 인민행동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국민당의 지지하에 탄생된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중국 각 지역 폭력조직의 연합기구로 두웨성이 책임자였다. 이는 두웨성이 실제로 중국폭력조직의 총두목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국민당의 임시 수도는 충칭(重慶)으로 이주하자 두웨성도 함께 충칭으로 갔다. 그러나 1945년 9월 초 상하이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부터 두웨성은 몰락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이유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장졔스로부터의 버림이었다. 세상이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상하이는 열강들의 침략기지였던 ‘조계’가 폐쇄되면서 그동안 암약하던 국민당세력이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변화는 폭력조직이 더 이상 예전처럼 중요한 위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원자였던 장졔스의 태도도 이미 변화되었다. 두웨성은 ‘공식권력’과 ‘비공식권력’의 차이를 절감했다. 당시 그는 상하이 의회 의장에 당선이 되었으나 국민당은 이미 그를 바라다보는 눈빛이 곱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사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공상, 금융, 교통, 문화, 교육, 언론 매체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세력을 넓히려고 애를 쓰면서 각종 단체의 이사장, 회장, 상무이사 등 70여개의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서서히 버림을 받기 시작한 두웨성은 이제 자신의 친자식 두웨핑(杜維屛)이 장졔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에게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언도받기에 이른다. 권력 변화의 무상함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두웨성은  상하이에서 자신이 세력을 잃어가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새로운 역사 상황이 나타나고 있었다. 1949년 4월 27일 저녁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 대승을 거두면서 상하이를 압박하던 저녁 두웨성은 네델란드 선박 ‘보수운(寶樹云)’호를 탔다. 이 배에는 처첩, 자녀, 친구, 수행인 등 수십명이 타고 있었다.
두웨성은 홍콩에 도착한 뒤 젠니띠타이(堅尼地台) 18호에 몸을 숨겼다. 이 집은 방 3개에 거실이 하나딸린 집이었다. 자신의 부하가 마련한 집이었다. 잘나가던 상하이 시절을 생각하면 서글프기까지 했다.
두웨성의 상황은 이토록 변해있었다. 두웨성은 홍콩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식이 재발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상하이 칭방의 우두머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병마는 신경쇄약증에 심장병까지 앓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홍콩은 상하이 생활을 비교할 수 없었다. 그가 상하이를 떠날 때 동후루(東湖路) 부근의 집을 팔아서 챙긴 45만 달러는 홍콩에서는 금방 없어지고 말았다.
씀씀이가 컸고 거느리는 식구가 많았던 때문이었다. 매월 6만 달러 정도를 쓰고 있었다. 두목으로서의 체면 유지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홍콩에 함께 온 부인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넷째 부인 야오위란(姚玉蘭)과 유명한 경극배우였던 멍샤오똥(孟小冬)이었다. 이들의 보살핌으로 두웨성은 말년을 그나마 위안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샤오똥은 두웨성에게 경극을 가르쳐주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잠시 건강이 호전되어 산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망가진 건강은 이제 회복이 불가능했다. 말년의 두웨성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각축 속에서 그를 데려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그를 이용해 사회적인 정화활동의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장제스와 함께 중국공산당원을 살해한 사실을 보복할 필요가 있었고, 타이완으로 쫓겨간  국민당은 장제스와의 결탁의 비밀이 폭로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타이완의 국민당은 홍콩으로 사람을 파견 그를 타이완으로 오게 하려고 공작을 폈다.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1951년 7월 어느날 날씨가 무척 더운 날이었다. 두웨성은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두웨성은 좌석에서 배가 팽창하는 느낌을 받았다. 손으로 배를 가리키면서 “좀 불편해 들어가 쉬어야겠어!” 말을 마치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리에 마비가 왔다. 감각을 잃어버렸다.
중풍이 온 것이다. 두웨성은 혼자말로 “안돼, 안돼, 정말 안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 달이 지난 뒤 유언을 하고 처첩과 자식들에게 얼마되지 않은 재산 분배를 한 뒤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국민당의 공작에 의해 타이완으로 이동했다. 그는 결국 타이완 북쪽 지방 지룽(基隆) 항구가 보이는 낮은 언덕 위에 묻히고 말았다. 역사속의 수많은 ‘비공식 권력’의 최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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