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같은 부드러움과 불같은 열정을 가진 "외교술의 천재"
물같은 부드러움과 불같은 열정을 가진 "외교술의 천재"
  • 한인희
  • 승인 2009.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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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周恩來) “외교술을 말한다”

우리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시대를 만들어간 영웅이었다. 그는 20세기 중국 역사무대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저우언라이는 매우 재간이 있고, 국제 활동 분야에서는 나보다도 훨씬 강했고, 각 분야의 관계를 잘 처리했으며 민첩하게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했다.
적장이었던 장제스도 저우언라이를 “확실히 쉽게 대응할 수 없는 상대였다”고 고백했다.일본인 학자 나시혼 유우헤이(梨本佑平)는 마오쩌둥은 대부분 강함 가운데 부드러움이 일부 있지만 저우언라이는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세계사적으로도 걸출한 외교 전략가였다. 그의 ‘평화외교 전략과 국제평화통일전선’ 사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인 신질서를 확립하고 국제관계를 처리하는 주요한 기준이 됐다. 그가 추진했던 ‘구동존이(求同存異)’ 전략은 중영, 중미, 중일관계의 대문을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가 상이한 국가와의 합작우호관계를 구축하는 발판이 됐다. 
그의 전략은 현재까지 중국외교정책의 기저가 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중국외교관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일중독’이었다. 그는 일을 하면서도 피곤을 몰랐던 인물이었다.
전 알제리대사였던 판청줘(范承祚)는 “1964년 1월 1일 알제리대사관에서 우리 사무실은 3층이었고, 총리는 2층에 머물고 계셨다. 마침 내 방이 총리의 옆방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침실로 가려고 했더니 갑자기 친숙한 총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오판, 아직 안자고 있어요? 쉬세요.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이 많아요!’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놀라 주 총리를 보니 낡은 잠옷차림으로 웃고있었다. 총리께서는 아마도 날이 밝으면 알제리 지도자들과 회담할 일을 생각하셨던 같다”고 회고했다.
전 주한대사였던 장팅옌(張廷延)은 “저우총리는 평상시 2-3시간만 잠을 자고 밤을 새고 일을 하였으며 오전에 잠시 눈을 붙이고 오후에 다시 일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검소했다.
전 외교부의전국장 지앙캉(江康)는 “1963년 12월 저우총리가 아시아 아프리카 14개국을 방문할 때 두 번째 방문국이 모로코였다. 당시 나는 총리의 짐 당당이었다. 모로코 측에서는 총리의 짐 운반을 위해 군용트럭 한 대와 경비병들을 파견해주었다. 저우총리의 짐은 가죽 가방 하나뿐이었고 그것도 너무 가벼웠으며 소가죽으로 만든 중국제였다.
가죽 가방은 색깔이 변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귀퉁이가 벗겨진 볼품없는 것이었다. 가방은 군용 트럭의 중간에 놓았다. 트럭의 양편에 의자가 있었는데 경비병이 타고 있었고 나는 대사관의 차를 몰고 트럭 뒤를 따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약 20분정도 걸렸는데 나의 총리의 가방이 밖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숙소인 대사관에 도착해 이 가방을 경호실장에게 넘기고 나서야 안심했다. 경호실장은 나에게 이 가방 안에는 저우총리의 빨래거리만 들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소매와 깃이 다 헤져서 다시 꿰메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세탁을 맡기기가 불편하니 대사관의 여직원에게 맡겨달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매우 세심한 인물이었다.
전 인도와 미얀마 대사 청래이성(程瑞聲)은 “가장 감동스러웠던 일은 1970년 12월 5일의 외교회의 상에서 저우총리가 나를 ‘나의 오랜 친구’라고 소개해준 일이었다. 총리는 통역들에게 매우 세심하게 배려했다.
한번은 우리 통역들이 마오쩌둥 주석 통역을 할 때 마오주석은 후난(湖南) 사투리가 너무 심했다. 저우총리는 젊은 통역들이 마오주석의 말을 통역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차근차근 마오주석의 말을 표준말로 우리들에게 말해줬다. 이것은 실제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전 이란대사 화리밍(華黎明)은 “내가 통역시절 총리의 업무는 매우 세심하였다. 따라서 총리의 통역을 한다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영어, 프랑스어를 잘 알고 있었고 비록 아랍어는 몰랐지만 그는 매우 자세하게 청취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총리가 10개 국가의 이름을 언급했다. 내가 통역을 하면서 한 국가를 빠트리자 총리는 즉시 ‘자네 통역 중에 하나를 빼먹었네’하며 바로잡아줬다.
저우총리는 업무에서는 빈틈이 없었다. 우리들이 통역을 할 때도 매우 엄격한 요구를 했다. 한번은 이란 왕비가 ‘총리께서는 식사하실 때 어떤 과즙을 드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중국 남쪽 출신이라 발음이 그렇게 표준 발음은 아니어서 대충 ‘즙’을 ‘스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비스하는 사람에게 ‘스프’를 달라고 했다. 총리는 곧바로 ‘자네 잘못했네. 이것은 즙이야 스프로 해석하면 안 되네’라고 지적해 줬다.  또한 총리는 통역을 평등한 지위에 있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총리가 주제하는 연회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었는데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고 반드시 지도자의 옆에 앉는 것이다.
1970년대 신문에는 통역자의 이름을 함께 병기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저우언라이는 외교전에서도 절대로 밀리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서방의 기자가 “현재 중국에는 창녀가 있습니까?”라고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중국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총리는 단호하게 “있지요”라고 했다. 이 발언에 모두들 놀라서 숨을 죽였다. “중국의 창녀는 우리 중국의 타이완성에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갑자기 박수가 터졌다.
이 발언은 당시 타이완이 중국의 영토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타이완의 사회적 분위기와 중국대륙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절묘한 발언이었다.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저우언라이 총리는 후르시쵸프를 만나 당시 소련정부의 ‘수정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러자 후르시쵸프는 당시 민감한 ‘계급문제’를 들고 나와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자극했다. 후르시쵸프는 “귀하의 비판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물론 동의하시겠지만 노동자계급 출신은 바로 접니다. 귀하는 부르주아계급 출신이시죠?” 이 발언은 저우 총리가 부르주아계급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공격이었다. 저우총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평정을 찾고 “네 그렇습니다. 후르시초프 동지! 그런데 적어도 우리 두 사람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계급을 배반했다는 점이지요”라고 강렬하게 통박하여, 소련이 수정주의적 입장을 강조하고 있고 중국이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반박했다.
한번은 미국의 중국방문단의 관리가 저우 총리에게 면전에서 질문을 했다. “왜 중국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걷기를 좋아합니까? 우리 미국인들은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길을 갑니다.” 이 말에 주변이 싸늘해졌다. 이는 당시에 외교관례상 미국인 관리가 중국인에 대해 매우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우총리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중국인들은 오르막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고, 미국인들은 내리막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외교장소에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참고 인내해야한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위신을 세워야 한다. 저우언라이는 어떠한 장소에서도 이러한 원칙을 지킨 인물이었다.

<글> 한인희 교수

대진대 중국학과교수
대진대 공자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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