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루스벨트의 행복론 (1)
[현대일보 칼럼] 루스벨트의 행복론 (1)
  • 이상철
  • 승인 2017.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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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경의 인물, 루스벨트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키스톤의 러시모어 산(Mt. Rushmore)엘 가면 네 명의 위대한 대통령의 조각상을 불 수 있다(이 기념공원의 면적은 1,533,600평). 나는 1970년대 미국 유학중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초대 대통령이고 위대한 민주국가를 위해 헌신한 조지 워싱턴(1789-97), 3대 대통령이고 독립선언문을 기초해 미국의 국가적인 성격(national character)을 영원히 규정한 토머스 제퍼슨(1801-09), 16대 대통령이고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의 분열을 막은 아브라함 링컨(1861-65) 그리고 26대 대통령이고 20세기 초 서부의 자연보호에 앞장섰고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1914)를 건설해 미국을 세계적인 국가로 격상시킨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09)이다.
이 조각상은 해발 1,745미터위의 바위에 머리와 얼굴 중심으로 조각돼 있다. 각 조각상의 크기는 18미터고 완성하는데 14년(1927-41)이 걸렸다. 유명한 조각가인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이 조각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해 아들 링컨 보글럼(Gutzon Borglum)이 완성했다.
시어도어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를 하다가 해군차관을 거쳐 1898년 뉴욕 주 주지사를 역임했다. 1900년 부통령에 당선됐다가 25대 대통령인 매킨리(1897-1901)의 피살로 42세에 대통령을 승계해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됐다. 
시어도어는 일로전쟁(1904-05)이 발발하자 일본은 극동(Far East)에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주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시어도어는 일본이 러시아 세력을 제거하면 아시아에서 평화가 유지될 것으로 믿었다.
미국의 생각대로 일로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시어도어는 양국 간의 평화협정을 중재해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1905)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 관저(1800, 21,600평)를 백악관으로 명명했고 최초로 백악관 기자단(White House press corps)를 창설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그의 5촌 조카인 프랭클린 루스벨트(32대, 1933-45)다. 프랭클린이 대학 2학년 때 삼촌인 시어도어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리고 2년 6개월 후인 1905년 프랭클린은 시어도어 삼촌의 조카  딸이며 인권운동가인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와 결혼 했다.
시어도어는 1901년 대통령으로 첫 국제무대에 진출하면서“말은 부드럽게 채찍은 큰 걸 가지라”(speak softly & carry a big stick)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20세기 미국 정치 10대 명언에 속한다.
미국의 대통령은 현재 트럼프를 포함, 45대이지만 44명이다. 글로버 클리블랜드가 22대(1885-89)와 24대(1893-97) 대통령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속되는 임기가 아닌 임기를 건너뛰어 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클리블랜드는 48세에 총각으로 대통령에 당선 돼 1886년 49세에 21세인 프란시스 폴섬과 백악관에서 결혼을 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44명의 대통령 가운데 성이 같은 인척 관계인 대통령은 위의 시어도어와 프랭클린 외에 6명이 더 있다.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1797-1801)와 6대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1825-29)는 부자간이다.
9대인 윌리엄 해리슨(1841.3.4-4.4)과 23대인 벤 해리슨은(1889-1893) 조부(할아버지와 손자)간이다. 그리고 41대(1989-1993)인 부시1세와 43대(2001-09)인 부시2세도 부자간이다.
17대인 앤드루 존슨(1865-69)과 36대인 린든 존슨은 성(존슨)은 같지만 인척간은 아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앤드루는 16대 대통령(1861-65)인 링컨 피살 후 대통령을 승계해 잔여 임기를 마치는데 그쳤고 린든은 35대 대통령(1961-63)인 케네디 피살 후 대통령을 승계해 잔여 임기를 마치는데 그쳤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했고 컬럼비아 법대를 다니다가 변호사 생활을 했고 1차 대전 중 윌슨 행정부에서 해군 부장관(assistant secretary of the Navy)을 역임했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 폭스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하딩과 쿠리지에 패했다.
다음 해인 1921년 그(39세)는 척추 성 소아마비(poliomyelitis)를 앓다가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자가 돼 평생 휠체어(wheel-
chair)신세를 지게 됐다. 그러나 그는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잃지 않고 정치를 다시 시작해  두 번(1928, 1930)이나 뉴욕 주 지사로 당선됐을 뿐 아니라 1932년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뿐 아니라 미국 대통령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번 당선돼 12년간(4번 째 임기를 3년9개월 남기고 병사) 백악관 주인을 했다. 지금은 수정헌법 제22조(1951)에 의해 어느 누구도 대통령에 2번 이상 당선 될 수 없다.
그는 그 어떤 역경에도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대공황과 나치 독일의 위기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끄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1942년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1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캠프데이비드란 대통령별장(15만평)을 지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신체적 장애에 대한 미국사회와 언론 그리고 시민의 반응과 태도였다.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이 불구가 된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자신의 불구를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숨겼다. 후에 한 역사학자는 이를 두고 루스벨트의 멋진 속임수(splendid deception)라고 했다.  
이를 존중해 미국 언론은 루스벨트가 불구라는 것과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진을 보여준 일이 없었다. 이결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대통령이 불구라는 사실 조차 몰랐다. 루스벨트가 12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휠체어에 앉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언론에 보도하지 않았다. 
그는 뉴딜정책(1933-36)을 통해 대공황으로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후버댐을 건설했고, 전력공급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를 했고 사회보장제도(1935)를 도입했다.
그는 그리고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기 11개월 전 연두교서(1941.1.6.)에서 세계 모든 나라의 시민이“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 부터의 자유 등” 네 가지 기본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자유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 했다. 
루스벨트의 소망대로 그가 연두교서에서 밝힌 네 가지 자유는 제2차 대전 후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설립(1948)된 유엔의 세계인권선언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으로 채택됐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자유이념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매년 대통령이 루스벨트의 자유이념 향상에 기여하고 헌신한 인사에게“루스벨트 자유상”(Four Freedoms Award)을 수여한다.  <다음주에 계속>

◇ 필자

이상철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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