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칼럼] 친절과 행복, 친절의 효과 (1)
현대일보칼럼] 친절과 행복, 친절의 효과 (1)
  • 현대일보
  • 승인 2017.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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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적 자유
우리 인류가 가장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친절, 사랑, 행복, 의미, 인내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말 들이 지니는 공통적인 속성이 바로  내적인 자유다.
빅터 프랑클의 말과 같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인 힘(나치권력)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갈수 있어도 오직 한가지만은 빼앗아 갈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자유다. 내적인 자유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 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말한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에 일어나는 것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
프랑클은 말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 어떤 고난이나 고통에 직면해도 이런 고난이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선택은 자신의 내적에 자유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위대해 질수 있는 것은 인간은 모든 것은 빼앗길 수 있어도 내적인 자유만은 빼앗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나치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심리학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내적인 자유의 신봉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치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쓴 “인간의 의미추구”란 저서는 21개 언어로 번역 됐고, 영어로 된 번역본만도 100쇄를 넘겼고 3백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지금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토인비가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열악한 기후와 환경, 압력 그리고 박해와 같은 역경을 미덕(virtue)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역경의 미덕이란 인류의 발전과 번영은 좋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역경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온다고 했다. 링컨, 헬런 켈러, 만델라, 테레사와 같은 인물이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것도 역경에 직면할 때 마다 역경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보는 내적인 자유 때문에 가능했다. 인간은 누구나 일생을 살면서 역경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마다 역경과 어려움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2. 친절의 효과
“친절한 한마디 말”은 평생을 가고 평생 영향을 미친다. 나는 1941년 강원도 홍천의 아주 외딴 산골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님은 춘천사범학교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셨다. 나는 아버님 덕분에 홍천이 아닌 춘천사범학교의 병설초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9살 때였으니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차편이 없기 때문에 홍천에서도 50리(12.5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동네 이름은 강원도 홍천군 동면 좌운 리 하고도 예의 천이란 한 적한 산골 마을이었다. 내가 어려서 듣기로는 “예의 천”이란 이름은 나의 증조할아버님이 벼슬을 하시다가 이곳 산속으로 들어오셔서 논과 밭을 개간하고 이 마을 이름을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 산다고 해서 예의천이라고 했다고 들었다. 천은 우리 집 논두렁을 지나면 개울물이 흐르기 때문에 천이라고 한 것 같다. 여기에 사는 주민은 10에서 15가구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나의 증조할아버님은 이곳에 와 어떻게 엄하고 억척스럽게 일을 했는지 동네서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증조할아버님이 지은 집은 이 동네서 가장 크고 멋있고, 집 앞에는 꽤 큰 논이 있고 논둑을 지나면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마을서 논이 있는 집은 우리 집을 포함에 2,3가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쌀밥을 먹은 집은 2,3개 집 밖에 안됐다고 생각된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9월에 돌아 가셨으니까 내가 3살이나 4살 때에 돌아가셨다고 생각된다. 할아버지는 이보다 4년 후인 1949년 7월에 돌아 가셨다. 할아버지보다 증조할아버지 기억이 더 생생한 것은 호랑이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 그늘에 가려져 밖에서 일만 하셨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집은 이 동네서 가장 큰 집이였기 때문에 집안의 꽤 넓은 앞마당과 집밖의 바깥마당이 있었다. 매년 가을 수확 철이 되면 집안의 앞마당에서  벼와 곡식을 도리깨(?)로 떨어 수확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흙으로 된마당에 축축한 물기가 있어 쌀알과 곡식알이 땅에 배겨 이를 모두 수확하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무 꼬챙이를 가지고 눅눅한 땅에 배긴 곡식알과 쌀알을 빼내고 있었다.
사랑방에서 문을 열고 지켜보던 증조할아버지가  나의 이런 행동을 보시고 아주 환한 웃음과 큰 소리로 너는 이다음에 아주 크게 잘 될 것이라며 나의 이런 작은 행동에 대해 어찌나 “친절한 칭찬의 말씀”을 해 주셨는지 지금도 무슨 사소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하다가도 증조할아버지의 친절한 말씀이 생각나 용기를 얻고 더욱더 정성껏 그리고 열심히 하게 된다.

<다음주 계속>

이상철
중앙대 신문방송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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