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칼럼] 인천상륙작전, 맥아더와 월미축제
[현대일보칼럼] 인천상륙작전, 맥아더와 월미축제
  • 강훈천
  • 승인 2015.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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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전 오늘은 역사 전환의 분수령을 이룬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날이다. 수도 서울을 단 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결단이었다.
나라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전세의 반전을 가져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첫 기착지였던 월미도는 역사적 조명과 함께 이젠 관광지로 부상했다.
역사적으로 운명을 가를 대규모 전쟁에는 다양한 작전이 구사되게 마련이다. 인천상륙작전도 그랬다.
남침 3일만인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 기고만장한 김일성은 7월 말 대전-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주공(主攻)을 지향하며 낙동강까지 밀어 붙인다.
그러나 아군의 방어선을 극복하기 위해 초전에 전력을 쏟아부은 김일성은 결국 소진 상태에 이른다. 무리수를 둔 것이다.
드디어 맥아더가 비장의 카드를 빼 들었다. 저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인 6월29일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 흑석동 뒷산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는 시간을 끌어, 저들이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면 저들의 주력을 일정한 지역에 고착시킨 후 서해안 상륙작전으로 측면을 찔러 적을 양단함으로써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겠다는 전술이다.
그러나 감행 직전 인천상륙작전을 놓고 “실패한 작전”이라며 참모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다. 역사상 500번의 상륙작전 중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제외하고는 성공한 작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맥아더는 “한 번이라도 성공한 기록이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마침내 상륙작전은 성공했고, 전쟁을 역전 시킴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는 장군으로 평가 받게 받게 됐다.
맥아더는 병법 성동격서(聲東擊西)를 제대로 썼다.‘소리는 동쪽에서 지르고 공격은 서쪽으로 하라’는 양동작전(陽動作戰)이 먹혀든 것이다.  병자궤도야(兵者詭道也)-어찌보면 전쟁은 속이는 게임이기도 하다.
‘세기의 노병(당시 70세)’이란 그의 별칭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그랬던 맥아더가 한 때는 일부 재야단체들로부터‘전쟁 범죄자’로 내몰리기도 했다. 10년 전 자유공원에 세워진 동상 앞에서‘맥아도 동상 철거, 타도’를 주장하는 일부 재야단체들로 수난을 겪었다.
이들의 언동은 한마디로 안하무인이었다. 대다수 국민의 동조 여부에는 아랑곳없이 억지와 궤변에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진짜 호전론자는 기습남침을 한 김일성이가 아닌가. 맥아더는 공산 제국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것이다.
맥아더를 전쟁범죄자로 몬다면 6.25 때 남한이 북한 수중에 들어 갔어야 했다는 논리다.
그래서 이번 월미축제와 겸한 인천상륙작전 65주년 전승 기념행사는 역사적 조명으로 문화적 가치를 승화시키고 평화통일의 염원을 일구는데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역대 처음으로 지역 축제인‘월미관광특구 문화축제’와 합쳐 전승행사가 지난 12일부터 4일간 진행되고 있다.
해군과 인천중구가 인천상륙작전 전승을 기념하고 시민이 화합하는 축제의 장을 마련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이면에는‘불꽃쇼’라는 요란한 행사에 일부 시민단체의 비판도 적지 않다. 이 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호화로운 외장에 내실이 묻힐까 우려에서다.
월미공원이 전승(戰勝)의 전초기지로 기념되고 시민이 다시 찾는 관광공원으로 거듭나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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