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중국의 스타학자, 신 ‘르네상스맨’이중텐(易中天) 교수 下
<중국, 중국인>중국의 스타학자, 신 ‘르네상스맨’이중텐(易中天) 교수 下
  • 한인희
  • 승인 2011.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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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설계의 슈퍼맨’중국 전역 풍미

이중텐과 『바이쟈장탄』과의 관계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는가?
『바이쟈장탄』의 제작자인 완웨이(萬衛)가 최초로 이들이 만나게 된 사실을 밝혔다. “저희들 가운데 어느 연출가가 있었는데 그분이 이중텐선생의『독성기(讀城記) : 국가보다 도시에 맹세하는 중국인』등을 너무 좋아했다. 지난해에 TV연속극『한무대제(漢武大帝)』를 열심히 방송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들은 이중텐선생과 전화로 통화할 수 있었다. 그런 뒤 그를 초청해 한무제 이야기를 듣기로 했었다” 이렇게 해 인연을 맺고 2005년 4월 이중텐은 중국 중앙TV『바이쟈장탄』에서『한대인물풍운』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감칠맛 있는 표현과 충만한 활력으로 역사의 품격을 이야기하고 류팡(劉邦), 한신(韓信), 차오춰(晁錯), 위안앙(袁盎) 등 인물군상들에 대해 마치 살았는 듯한 이미지를 강연하자 시청자들로부터 이른바 ‘한나라 붐’이 일어나게 됐다. 『한대풍운인물』은 이렇게 해『바이쟈장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됐다.
2006년초『한대풍운인물』의 강연 원고는 강의가 끝난 뒤『이중텐이 음미한 한 대 풍운인물(易中天品讀漢代風雲人物)』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됐다. 초기 판매량만 15만부에 달했다. ‘한대풍운인물’이 포성을 울린 뒤 완웨이와 연출가들은 이중텐 교수에게 계속해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 중앙TV에 ‘삼국’이라는 큰 타이틀의 프로그램이 결정됐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국의 계획은 이중텐교수로부터 거절당했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간이 너무 없고, 둘째는 자신이 ‘삼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이유였다. 이중텐은 만약 강의를 계속한다면『수호지』가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역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국측은 물러서지 않았다. 연출가는 이중텐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과 함께 청두(成都)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했다.
방송국 측은 여전히 인기도로 봐서 ‘삼국’이라는 큰 타이틀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송국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중텐은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고, 집사람과 상의한 뒤에 보자고 했다. 이렇게 되자 “이중텐교수는 매우 신중한 분이시만 부인을 설득하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완웨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결국은 쌍방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모든 것이 이중텐 교수 부인의 공로였다. 이중텐은 비록 합작에 동의했으나 당시 방송국이 삼국지에 대한 계획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를 알지 못했다. 완웨이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제가 이중텐교수님께 말했지요. ‘우리는 일년 간 할 생각입니다. 이교수님께서 모든 정력을 이곳에 쏟아 부시지요!’”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해 이중텐은 ‘공중곡예사’가 됐고 주말에는 베이징으로 달려와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오고 가는 비행기 안에서 대본을 읽었고 주제는 『삼국지』로 바뀌게 됐다.
이중텐의 프로그램 녹화는 매우 빨랐다. 일반적으로 하루에 5편의 『품삼국(品三國)』을 녹화했다. 녹화현장도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작은 스튜디오는 그다지 큰 방이 아니었다. 100여명을 수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많을 때는 140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방의 통풍이 잘 되지 않아 한번은 강의를 듣던 여학생이 혼절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후에는 방청객을 100명 정도로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이중텐과 같은 유명강사를 초청해 강의하는데 강사료는 얼마를 지급하는지 궁금했다. 완웨이는 돈은 학자들에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학자가 되기 위해 누군들 자신의 연구 성과가 확대되고 영향력이 크기를 바라지 않는 학자가 있겠는가?”라는 말로 대신했다. 사실 프로그램에서 강사들에게 주는 보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주로 교통비와 강사료를 지급하는데 이들이 관련 서적의 출판에서 얻는 인세에 비하면 세발에 피였다.
이렇게 해 이중텐은 2006년『이중텐품삼국(易中天品三國)』이 출판됐고, 명성이 중국 전역을 풍미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의 잡지계의 권위인『싼렌성훠조우칸(三聯生活周刊)』에서는 그를 ‘학술계의 수퍼맨(學術超男)’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2007년 11월 그는 상하이에서『이중텐이 제국을 말하다(帝國的終結)』를 출판했고, 2008년에는 그간의 명성을 바탕으로『바이쟈장탄』과 합작으로『선진제자, 백가쟁명(先秦諸子·百家爭鳴)』을 제작해 방영하기에 이르렀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우징렌(吳敬璉)은 이중텐교수의 16권의 문집 출판에 대해 “내가 생각하기에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축하할만한 일이다. 이선생의 저작은 내가 읽은 바로는 매우 특색이 있다. 이중텐은 자신이 관찰한 일들, 자신이 느낀 점을 독자들과 교류를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30여 년 간의 개혁을 거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하나의 현대화된 중국, 현대적인 경제 질서를 건립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의 문제는 사회현대적인 국가 건립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강력한 문화적인 뒷받침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들의 전통문화 속에서 섭취할 자원을 가꾸지 못했고 현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문화적인 기초가 없었다. 이선생이 다루는 영역은 매우 광범하고『품삼국』에서 시작해 그는 어떻게 에센스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할 것인지, 어떻게 중국의 전통문화와 현대적인 생활이 결합될 수 있는지를 창조한 인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현대적인 문화시스템으로 현대 중국을 건설해야한다. 그것은 매우 의미가 큰 것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의 엄청난 노력으로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해 사람들로 해금 낙관적이 되고 더욱 쉽게 영양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비록 그의 견해의 독창성과 표현방식은 많은 논쟁을 가져오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성과가 전집으로 출판된 것은 현재 현대 국가 건설에 필요로 하는 문화건설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 토론에 참여하고 이러한 큰 프로젝트 건설에 참여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얻음이 있을 것이다. 이선생에게 축하를 보내고 우리들의 출판계에도 축하를 보낸다. 우리 독서계에 축하와 추천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우한대학의 전임총장이자 저명한 교육가인 류따오위(劉道玉)는 “내가 기억하기로 80여 년 전에 위대한 인민의 교육가인 타오싱즈(陶行知)선생께서 ‘선생님이 되는 가장 큰 행복은 자부심과 존경심을 갖도록 하는 학생들을 배출하는 일이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중텐교수는 우한대학의 1980년대에 배출한 나의 자랑스럽고 가장 뛰어난 학생 가운데 하나다. 나는 오늘 이러한 바로 그러한 행복 속에 내가 있다. 그는 나의 학생이지만 예전에 사귄 친구들과는 다른 개성을 갖추고 있고 우리들은 모두가 자유와 민주정신을 추구한다. 오늘날 교내외 학생들은 모두가 이중텐에게서 어떤 중요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가? 나는 세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이중텐교수는 매우 강한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과 매우 높은 지성을 갖고 있다. 그는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고등학생에서 바로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이다. 이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기초다. 둘째, 그는 민주자유를 추구한다. 학문을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진리를 추구하는 필요한 정신을 갖고 있다. 바로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셋째, 이중텐은 학문을 하면서 하나의 전공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전공을 모두 꿰뚫고 있는데 이점은 그가 이처럼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데 중요한 학술 품격이다. 내가 기억하건데 타이완의 국학대사 첸무(錢穆) 선생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큰 스승은 스스로 배워 막힘이 없으며 각 분야 전공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갖 지식에 초탈한 사람이다’라고! 이중텐이 이러한 성취를 이룬 것은 바로 한 학문에 전념하지 않고 문학, 미학, 국학, 사학, 철학, 지혜학, 심지어는 인구학 분야에 광범하게 섭렵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가 이룬 성취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마침내 이중텐은 유명해졌고 중국 문화계의 우상이 됐다. 많은 매체들이 이중텐은 『바이쟈장탄』에 고마워해야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유명해졌으니까. 사실은 『바이쟈장탄』이 이중텐에게 감사를 해야할 것이다. TV매체는 종미매체보다는 백성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책과는 완전히 다르다. 스스로 시간을 갖고 여러차례 중복해서 시청할 수도 있다. 이중텐의 유명세는 오히려 중국문화의 살아있는 문학적 매력을 새롭게 깨우치게 된 계기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노력은 지식인의 사회적 공헌의 한 분야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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