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중국의 스타학자, 신 ‘르네상스맨’이중텐(易中天) 교수
<중국, 중국인>중국의 스타학자, 신 ‘르네상스맨’이중텐(易中天) 교수
  • 한인희
  • 승인 2011.11.21 00:00
  • icon 조회수 227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해설 위해 역사책으로 들어가다’

이중텐을 중국에 알린‘바이쟈장탄’
과거의 영광 재현‘국학붐’일으키다

많은 중국인 학자 가운데 최근 한국에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중텐교수다. 그의 저서는 이미 12권 이상 한국에 번역 소개다.
그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저자 가운이다. 2007년에는 인세로만 1억위안(한화 약 200억원)을 벌었다. 그의 수입은 중국 저자 가운데 3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중국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이들은 그를 저명한 저자이자 역사학자로 그리고 정치학자로 보고 있다. 그만큼 그는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통섭의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다양한 분야에 깊이 있는 지식을 갖고 있고 독특한 역사해석으로 중국의 문화를 다시 재발견하게 하고 있다.
그는 1947년 후난(湖南) 창사(長沙)에서 태어나 6살에 부친 이팅위엔(易庭源)을 따라 후베이(湖北)의 우한(武漢)에 정착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우한에서 생활하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이후 대학을 진학해야했지만 그는 당시 중국을 휩쓸던 이른바 ‘지식청년 상산하향운동’에 내몰려 중국 서부의 궁벽한 신장(新疆)지역의 생산건설병단에 배치돼 노도에 참가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 13년을 그는 이곳에서 보냈다. 이중텐은 신장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그곳에 있던 것을 시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활은 시가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생활한 곳은 구얼반퉁구스트(古爾班通古特) 사막 근처의 군대가 개간하는 농장이었다. 위그르어로 ‘구얼반퉁구스트’는 ‘멧돼지가 출현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험악하고 야생지역을 뜻했다. 이 사막은 중국 내의 두 번째로 큰 사막이다. 면적은 4만 5천 평방키로미터로 중국에서 가장 넓은 타클라마칸 사막 다음으로 세계에서도 3번째로 큰 사막이었다.
이중텐이 이곳 생활을 끝낼 즈음, 중국은 개혁개방이 시작됐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사상해방을 강조하면서 마오쩌둥시대의 ‘계급투쟁’에서 ‘지식과 전문화’를 강조하면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다. 그 첫 번째 조치로 그동안 폐지됐던 대학입학시험인 까오카오(高考)를 1977년에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시험지를 인쇄할 종이가 없자 ‘마오쩌둥선집’ 인쇄에 쓰려던 종이를 사용해 문제를 출제했다. 처음으로 실시하는 대학입학 시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시험에 참가하는 지난 10년간 문혁의 패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시험으로 의미가 컸다. 그러나 이중텐은 대학에 진학하는 시험에 참가하지 못하고 건너뛰어 우한대학 대학원 시험에 참가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후 이중텐이 우한대학 문과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그의 강의가 우한대학에서 최고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봉급은 다른 교수들에 비해 크게 적었다. 왜냐하면 그는 학부 학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부를 다니지 않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던 사실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가 학부 시험을 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당시 까오카오를 보던 시점에 그는 아직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따라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학부 시험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 그는 대학시험을 못볼 바에 바로 대학원 시험을 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불합격해도 믿져야 본전이지 뭐’라고 생각하고 친 시험에 합격해 우한대학 문학원의 첫 번째 대학원생이 됐던 것이다. 봉급이 다른 사람에 비해 적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 1978년 이중텐은 동등한 학력 취득이라는 자격을 통해 우한대학 대학원에서 고대문학을 전공하게 됐다.
우한대학 대학원에서 3년간의 연구생활은 이중텐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이중텐은 다른 학생처럼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면서 힘들어하는 그런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수업에서도 적극적이고 매우 활발한 학생이었다. 대학원 수업이 끝난 뒤에도 그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문학, 역사, 철학, 경제, 이과(당시 우한대학은 공대가 없었다) 거의 모든 강의들을 섭렵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폭넓게 친구들을 사귀면서 견문을 넓혔다. 이중텐의 그러한 생활은 점차 사상적으로 광범위하고 이성적으로 더욱 성숙해져갔다. 1981년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을 때 당시 우한대학의 류다오위(劉道玉)총장은 이중텐에 대해 ‘자네는 정말로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칭찬하며 이중텐을 학교에 남아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자격문제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위해 당시 교육부장관이던 장난샹(蔣南翔)과 신장위그르 자치구의 당위원회 서기였던 왕은우(王恩茂)까지 동원됐다. 마침내 교육부는 이중텐이 교수직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문건을 만들게 됐다. 그리하여 결국 이중텐은 우한대학 문학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고, 1992년 샤먼(廈門)대학 중문학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계속 우한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문학, 역사, 미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이 모두 이중텐의 연구 영역이었다. 그가 이렇게 박식하게 연구 범위가 넓어지게 된 것은 그의 큰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그의 백부가 칭화대학(淸華大學)의 역사학과를 졸업했고 저명한 역사학자 지엔바이잔(翦伯贊)과 같은 반 친구였다. 그리하여 이중텐은 어릴 때부터 자주들어서 익숙해 습관이 됐고 역사학에 큰 흥미를 갖게 됐던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편찬했다.『미학사상논고(美學思想論稿)』,『예술인류학(藝術人類學)』등을 저작했다. 이어서 그를 사회적으로 명성으로 이끈 이른바 “이중텐수필체학술저작, 중국문화시리즈”의 4종을 편찬했다. 그것이 바로 『중국인에 대한 한담閑話中國人』,『중국의 남자와 여자(中国的男人和女人)』,『중국 도시 중국 사람(讀城記)』,『품인록(品人錄)』등 4권이다. 그를 중국 전역에 알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2005년부터 시작된 중국CCTV채널 10에서 방영한『바이쟈장탄(百家講壇)』에서 였다. 이것이 바로 이중텐이 성공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의 CCTV가『바이쟈장탄』을 기획하면서 그에게 강의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곧 바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학교의 강의는 시험을 본 뒤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석사과정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바이쟈장탄』 은 너무도 다양한 계층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 다양한 시청자들은 TV 리모콘을 들고 두 눈으로 빤히 쳐다보다 보다가 ‘저렇게 못생긴 사람이 뭐라고 떠드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체널을 돌릴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중텐은 ‘여기에서는 스스로 편집을 하고, 스스로 연출자가 되고, 스스로 연기를 해야만한다’라고 독특한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강단(講壇)’과 ‘논단(論壇)’은 한 글자 밖에 차이가 없으나 의미는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강단’은 상대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고, ‘논단’은 학자들이 학술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더욱이 방송은 곧바로 평가할 수 없는 자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송을 위해 연구하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특히 역사를 해설하는 자가 되려면 역사책 속에 들어가 자신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해야만 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역사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 그는 삼국지를 재해석한『품삼국(品三國)』(하)를 집필할 때 칼 마르크스의 가장 뛰어난 역사 서술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1848년 건립했던 단명한 공화정을 쿠데타로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한 과정을 연구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은 역사를 재해석하고 한나라시기 풍운 인물들을 독특한 시각에서 유머스럽게 소개하면서 유명세를 타게됐다.
방송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는 단정하게 중산복을 입고 등장해 차분하게 중국의 역사이야기를 했다. 당시 중국은 지난 100여년간의 굴욕을 떨쳐내고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다. 중국은 구질구질한 나라가 아니라 이제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이른바 ‘국학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것은 중화민족주의의 부활을 요구하던 대중의 심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다시 TV에 섰고 대중들은 그의 강의에 열광했다. (다음주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