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중국의 ‘음료수대왕’, 와하하그룹의 쫑칭허우(宗慶後)
<중국, 중국인>중국의 ‘음료수대왕’, 와하하그룹의 쫑칭허우(宗慶後)
  • 한인희
  • 승인 2011.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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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식욕부진 음료로 해결‘성공 밑걸음’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여행의 고달픔을 달래기 위해 가장 먼저 음료수를 찾게 될 것이다. 이때 그들의 눈에 가장 흔하게 찾게 되는 음료수가 바로 ‘와하하(娃哈哈)’라고 하는 상표다. 이 기업은 중국 기업발전사에서 하나의 기적을 이룬 기업이다.
처음 몇 만원으로 시작한 기업이 짧은 20여년의 기간에 일약 자산이 150억 위안의 거대한 중국 음료업체로 성장한 것이다. 비록 성장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발전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중국에서 ‘와하하’ 음료 상품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 기업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발전 행보를 함께한 브랜드이기도 하다. 초기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난 뒤 더욱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와하하’ 그룹을 이끌고 있는 기업인이 바로 전설적인 기업가 쫑칭허우다.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논쟁도 많고 그만큼 영향력도 큰 기업가이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살이는 지금도 중국인들과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쫑칭허우는 저장성 항저우 사람으로 1991년부터 현재까지 항저우의 와하하그룹의 이사장 겸 총경리이다. 2010년 9월 쫑칭허우의 재산은 800억 위안이다. 2010년 중국의 최고 부자의 대열에 올랐고 이는 중국에서 최초로 ‘음료수대왕’이 전국의 최고 부자가 된 최초의 일이었다. 2011년 <포브스> 잡지가 뉴욕에서 전 세계 부자들을 순위를 발표하였다. 중국대륙의 부자들이 눈에 띠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와하하’ 그룹의 쫑칭허우의 재산은 59억 달러로 세계 169위에 랭크되었다. 그러자 그의 정치적인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그는 2011년 봄에 개최된 중국의 정치적 집회인 ‘양회(전인대와 정협회의)’에서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부동산사용권을 70년으로 제한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지적하고, 이 제도는 세세손손 주택의 노예가 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그의 삶을 살펴보자. 그는 1945년 10월 12일 장수성 쑤첸(宿遷)시의 따퉁따지에(大東大街)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자매들은 5명이었다. 그의 조부는 근대의 동북군벌이었던 짱쭤린(張作霖) 밑에서 재정부장을 지냈었고, 부친은 국민당의 관리를 지낸 집안이었다. 쫑칭허우의 부친 쫑치뤼(宗啓騄)는 난징(南京)과 쑤첸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증조부 대에서는 모두가 항저우부(杭州府)의 첸탕시엔(錢塘縣)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이 해방된 이후에 비로소 가족들은 항저우 고향으로 돌아와 일을 하게 되었고 쫑칭허우도 17살에 아버지를 따라 항저우로 오게 되었다. 쫑칭허우의 가족은 일찍이 한때 잘나가는 집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이후 당시 가족들의 생활은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아버지는 직장이 없었고 초등학교 선생을 하는 어머니의 박봉에 의지하여 온 가족이 생활하였다. 쫑칭허우는 1963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집안의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저우산(舟山)에 있는 농장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주로 소금을 만드는 염전에서 일을 하였다. 몇 년 후 이곡 저곳을 전전하다가 샤오싱지우(紹興酒)로 유명한 샤오싱(紹興)에 가서 찻집에서 일을 하였다. 곧 이어 전 중국은 대동란의 시기인 문화대혁명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많은 지식청년들의 농촌에서 배우라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이른바 ‘지식청년하향운동’ 전개되었다. 쫑칭허우도 지식청년 하향운동의 선발대로 뽑혔다. 그리하여 그는 바닷가에서 소금을 캐고 말리고 선별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차밭에서는 차를 심고, 분류하고, 벽돌을 굽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당시 다른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쫑칭허우는  “머리 속으로 온갖 다양한 꿈을 꾸고 있었고” “생각이 들면 이후에 반드시 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를 농촌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15년을 허송세월을 하였다. 이러한 회색의 시간을 도피하는 유일한 길은 닥치는 대로 책을 구해 독서를 하는 일이었다. 그 일만이 그나마 그를 위로해주었다. 마침내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던 1978년 지식청년들이 대대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33살의 쫑칭허우는 항저우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학교에서 설립한 공장에서 영업사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10년 동안 이런 저런 학교에서 설립한 기업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의연하게 원래의 꿈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기업가로서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창업이 붐을 이루는 시기에 그의 나이는 이미 42살의 말이 없는 중년의 남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기업가 가운데 홍콩의 대재벌 리자청(李嘉誠)을 가장 존경하였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바로 ‘항저우의 리자청’이 되는 일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리자청’이 된다는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성공한 이후 “사실 리자청이 사업을 했던 전반기 20년 성적은 와하하그룹의 쫑칭허우의 15년의 업적보다 절대로 크지 않았다”라면서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쫑칭허우에게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존경하는 리자청보다 23년이나 늦게 사업을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42세의 나이란 이미 생활에 피로가 쌓이고 인생의 희망을 다음세대에게 넘기는 나이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의 운명마저 포기했던 반평생을 이번 사업을 시작하는 기회를 틈타 운명의 새로운 끈을 하나하나 잡기 시작하였다. 쫑칭허우는 마치 일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비바람 속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삼륜차를 타고 물건을 나르고 지난날의 그렇게 허비했던 모든 시간들을 단시간에 메꾸려고 애를 썼다. 그에게 이 시기는 각고의 세월이었다. 쫑칭허우가 학교의 부속 공장을 막 설립했을 때 자금도 없고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회사에 불과하였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심때가 되면 1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밥을 끓여 먹었다. 삶에 찌든 이들은 서로 짜증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다고 하더라도 모든 인생을 성공에 도박을 건 쫑칭허우는 일을 하면서 더 이상 실망감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삶을 허송했기에 남은 것이라곤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무모하게 덤벼든 것에 대한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 지난날의 잘못을 되새겼다. 1979년 쫑칭허우는 어머니와 함께 항저우 초등학교의 직공이 되었다. 1987년 그는 그와 은퇴한 두명의 교사와 함께 학교 부설 기업을 설립하였다. 주로 부근 학교에 문방구류와 아이스바 등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물건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쫑칭허우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식욕이 부진하고 영양이 불량하다는 사실을 깨닳았고 이 문제가 학부모들의 가장 골치아픈일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느끼기기에는 아이들의 영양액을 만들면 큰 돈을 벌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기회를 잡으려고 생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47살이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사업하는 권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이 일에 매진하였다. 1988년 쫑칭허우가 이끄는 이 학교부설 기업은 14만 위안을 대출을 받고 전문가와 연구자들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아동들이 마실 수 있는 영양제품인 바로 ‘와하하아동영양액’을 출시하였다. 광고를 만들었다. “와하하를 마시면, 밥맛이 좋아집니다!”였다. 이 광고는 전 중국을 휩쓸었다. ‘와하하아동영양액’은 신속하게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4년차에 판매액이 4억위안에 달하였고 순이익이 7000만 위안이 되었다. 이로써 와하하의 초보적인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쫑칭허우는 이후에 “당신은 47세의 중년의 남자가 일생에서 마지막 기회를 걸고 있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10년 이후, 와하하그룹을 중국 최대 음료기업으로 성장을 시켰다. 2002년 와하하 그룹의 전체판매액은 88억위안이었고 순수입은 12억위안이었다.(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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