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노벨상에 다가선‘타이완의 배신자’ 세계은행 부총재 린이푸(林毅夫)
<중국, 중국인>노벨상에 다가선‘타이완의 배신자’ 세계은행 부총재 린이푸(林毅夫)
  • 한인희
  • 승인 201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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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보통신·금융개혁등 주요정책 제안

 시어도어 슐츠 통역선발 미국유학 기회 얻어
 세계은행부은행장 업무 마치면 강단으로…

린이푸는 대륙으로 귀순한 뒤 곧바로 북경대학의 경제학과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린이푸의 이른바 ‘암흑을 박차고 광명을 찾은’ 행동에 대해 당시에는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린이푸는 처음에는 중국인민대학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이력이 불분명하다’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하였다. 이렇게 하여 북경대에서 공부하게 된 린이푸는 서방 경제이론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특히 영어회화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유창한 회화를 구사하게 되었다. 학업성적은 동급생들에 비해 눈에 뛸 정도로 잘하였다. 그러나 준비한 자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 중국은 대외개방을 막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이때 귀한 손님이 북경대학을 찾았다. 그가 바로 197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카고 대학의 명예교수인 시어도어 슐츠(Theodore William Schultz)였다. 중국을 방문한 슐츠는 중국 최고학부인 북경대학에서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강의하게 되었다. 당시 북경대학 당국은 통역사를 찾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바로 린이푸가 슐츠의 통역으로 선발되었다. 린이푸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기회였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세계경제학의 최고 전당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강연을 마친 슐츠는 린이푸를 극찬하였다. 슐츠가 린이푸에게 물었다. “미국에서 박사를 공부할 생각이 없나요?” 린이푸는 즉각 “예, 있습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린이푸는 슐츠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것으로 생각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슐츠는 얼마 뒤 공식적으로 린이푸를 미국의 시카고대학에 추천하였다. 당시 노벨상 수상자인 슐츠를 지도교수로 모시는 일은 많은 경제학자들의 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린이푸는 미칠 듯이 기뻐하였다. 마침내 1982년 린이푸는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정치경제학 전공의 석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는 곧바로 바다 건너 공부를 하러 떠나게 되었다. 현대경제학의 대본영인 시카고대학에 갔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슐츠를 지도교수로 농업경제를 공부하였다.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린이푸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한편으로 대만에 있는 가족들은 린이푸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당시 린이푸가 필요로 하는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하면 대만의 가족들이 송금해주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린이푸가 이미 성공한 오늘, 그의 형 린왕송(林旺松)은 북경대학에 ‘중국경제연구상’을 제정하고 기금을 출연하였다. 그리하여 북경대중국경제연구센터는 2000년부터 매년 전국적인 ‘경제학우수대학생섬머캠프’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캠프는 중국의 우수한 경제학 전공 대학생들 간의 사상적인 교류를 촉진하고 젊은 학생들과 유명 경제학자들 간의 연계를 강화하게 함으로써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함으로써 그들이 계속 연구하도록 도와주는데 목적이 있었다. 부인이야기를 해보자. 린이푸의 부인은 천윈잉(陳雲英)이다. 대만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잉꼬부부였다. 천윈잉은 고등학교에서 어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린이푸는 천윈잉에게 물을 한 컵 가져다주고 조심스레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만약 어느 날 내가 보이지 않으면 왕바오추안(王寶釧:당나라 재상의 딸이었으나 평민 薛平貴와 결혼하여 군대를 떠난 그를 18년간 기다린 인물)때와 마찬가지로 18년을 잘 참고 견딜 수 있겠소?” 천윈잉은 남편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이후 린이푸는 1979년 5월 16일 밤 이후 정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당시 그들 사이에는 큰 아들이 겨우 3살이었고, 임신을 한 상태였다. 집안 식구들은 린이푸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의 위패를 세웠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이 강인했던 천윈잉은 절대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눈물로 지새우며 “살아있다면 사람을 볼 것이고,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볼 것이다”라는 강한 의지로 삶을 살았다. 몇 년이 지난 뒤 천윈잉은 갑자기 린이푸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녀는 미친 듯이 기뻤다. 그녀는 곧바로 미국으로 가서 남편을 만나보고 싶었다. 1983년 천윈잉은 6살짜리 아들과 4살짜리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미국에서 4년을 사는 동안 같은 도시에 함께 살지 못했다. 공부하는 곳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천윈잉은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키우고 한편으로 논문을 쓰면서 1년 반의 시간을 미국의 에딘버러대학에서 특수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31살부터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인 뒤 교실로 달려가 수업을 들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몸에는 언제나 퀴퀴한 중국요리 냄새가 났다.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1987년 린이푸가 귀국을 하던 해 6월 18일, 천윈잉은 박사학위 구술시험을 마친 지 8일 만에 남편을 따라 북경으로 오게 되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열심히 살았다. 여러 차례 국가 교육위원회 및 장애인연합회에서 상도 수상하였고, 전국청년연합회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정협 위원에 당선되었다. 린이푸와 함께 정협회의에 참석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부부가 함께 정치를 논하는’ 모범으로 삼기도 하였다. 천윈잉은 중국 최초의 해외에서 특수교육박사학위를 받은 특수교육전문가였다. 따라서 중국특수교육사업의 ‘선각자’가 되었다. 1987년 린이푸는 중국으로 돌아온 것은 중국에서 개혁개방 이후 최초로 해외에서 귀국한 경제학 박사였다. 그는 먼저 국무원의 ‘발전연구중심’의 발전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3년 뒤 그는 국무원발전연구중심 농촌부 부부장이 되었다. 1990년에는 1959-1961년 기간의 중국대기근에 관한 논문인 <집체화와 중국의 1959-1961년 시기 농업위기>라는 논문을 국제적인 저널인 <정치경제저널>에 발표하여 뜨거운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에는 <미국경제평론>지에 <중국의 농촌개혁 및 농업성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국제경제학계 저널에서 최다 인용 논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두 편의 논문은 린이푸를 국제적으로 발전경제학과 농업경제학계에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게 해준 논문이었다. 이후 일부 구미의 중국문제연구기관은 린이푸를 중국농업경제와 사회문제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하고 여러차례 그를 초청하여 방문 연구를 하도록 해주었다. 1994년 그는 모교 북경대학으로 돌아왔다. 해외에서 귀국하는 학자들과 함께 ‘북경대학중국경제연구센터(CCER)’을 설립하였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중국경제개혁과 발전의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1994년 중국경제연구센터가 설립된 이후 국내의 주요정책의 제정과 토론에 우리 모두가 참여했다. 연구주제는 정보통신개혁, WTO 가입, 금융개혁, 농촌발전, 사회보장체계, 농민공, 식량문제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연구센터는 독보적인 정책들을 제안하였으며 우리 센터의 많은 사상과 관점이 개혁의 주요한 내용이 되었다”라고 이 연구센터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2006년 6월에는 린이푸가 이끌고 있는 북경대학중국연구센터는 경제매체와 중국유미경제학회가 추천한 ‘중국내지 경제학 교육연구 능력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한편 <포춘>과 <포브스>는 북경대의 국제MBA과정을 중국 내 최고 가치있는 기관으로 선정하였다. 이로써 린이푸는 오늘날처럼 중국경제학연구의 대본영이 되도록 한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곳 연구자들은 북경대학, 하바드대학, 스텐포드대학, 시카고대학 등 전 세계 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최근 린이푸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중국의 금융개혁 연구를 위한 중요한 연구기관인 ‘장성(長城)금융연구소’를 설립하고 중국의 금융체제개혁과 민영은행의 대대적인 발전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9월 7일 베이징대학 홈페이지에 따르면 “세계은행 수석 부은행장이자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전 베이징대학 중국경제연구센터 주임 린이푸(林毅夫)가 주산루(朱善璐) 베이징대학 당 서기와 저우치펑(周其凤) 총장에게 2012년 6월 정식으로 세계은행 업무를 마치고 다시 베이징대로 돌아와 계속해서 연구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는 보도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저우치펑 총장은 “베이징대학을 대표해 린이푸 교수가 세계은행의 임직 기간을 마친 후 베이징대학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교편을 잡게 된 것을 매우 환영한다”고 전했으며, 주산루 당 서기는 “린이푸 교수가 세계은행에서의 경험들을 강의와 잘 접목시켜 학생들에게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해 주고, 개혁개방 이래 중국 경제발전의 성과들을 잘 종합해 경제학 이론에 새로운 혁신을 가져와 경제학을 베이징대 최고의 학문으로 성장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그에 대한 중국의 기대가 큼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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