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노벨상에 다가선‘타이완의 배신자’ 세계은행 부총재 린이푸(林毅夫)
<중국, 중국인>노벨상에 다가선‘타이완의 배신자’ 세계은행 부총재 린이푸(林毅夫)
  • 한인희
  • 승인 2011.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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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본주의 경제변화 연구 인생목표 정해…

중국 귀순 후‘린정의’서 ‘린이푸’로 개명
‘남자로서 꿋꿋하게 살아가자’ 의지표명
 미국대학 교수직 거절…국제적 화제의 인물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린이푸는 전기적인 인물이다. 베이징대학 중국경제연구센터 주임이었던 린이푸는 2008년 2월 개발도상국가 출신 중에서는 최초로 세계은행(WB) 수석 부행장으로 영입됐다. 그는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동안 수차례 중국을 방문했고, 베이징대학을 찾았다. 그가 주임으로 있던 중국경제연구센터는 이미 ‘국가발전연구원’으로 개명했다. 린이푸는 국가발전연구원 명예 원장이 되었다. 지난해에는 그가 이룬 업적을 기반으로 영국과학원의 외국인 학술위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중국 경제에 대한 그의 발언은 세계가 주목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대만 출신이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만의 최고학부인 대만대학의 농공학과에 입학하였고 그런 뒤 군대에 입대하여 대위로 근무하게 되었다. 린이푸는 대만군대의 장학금을 받고 대만정치대학의 석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 뒤 1978년 대만의 최전선인 진먼다오(金門島)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1979년 5월 진먼방위사령부에서 대만 육군의 대위로 근무하는 중 대만군대의 병력 배치도 등 기밀문서를 들고 야간에 수영으로 중국대륙으로 귀순한 인물이었다. 이후 베이징대학 경제학과 석사과정을 다시 이수하고 그런 뒤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유학하였다. 1986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중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 초기로 해외에서 학위를 받은 유학생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이후 그는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이수한 뒤 자신의 인생 목표를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변화해가는 중국 경제를 연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미국대학의 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러한 행동은 국제적으로 다시 한번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린이푸는 중국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농촌부 부장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 베이징대학의 중국경제연구중심을 설립하고 자신이 주임이 되었다. 그는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중국개혁개방에 관한 이론들을 발표하였다. 당시 칭화대학의 후안깡(胡鞍鋼)교수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가 되었다. 그는 중국 최고학부 베이징대 경제학과의 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경제학자가 되었다.
린이푸는 1952년 10월 15일 대만의 이란시엔(宜蘭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린훠수(林火樹)는 아들의 이름을 린정의(林正義)라고 지어주었다. 그 이유는 아들이 인생을 살면서 정직하고 정의감이 풍부한 사람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중국으로 귀순 뒤에 이름을 린이푸(林毅夫)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쩡즈(曾子)가 한 말에서 찾았다. 즉 “인을 실현하는 일이 자신의 책임인데 그 어찌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평생토록 분투하여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어찌 멀다하겠는가?(士不可以不弘大刚强而有毅力,因为他责任重大,道路遥远)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린이푸는 자신의 이름을 이푸(毅夫), 즉 남자로서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던 것이었다. 린이푸는 어릴 때부터 국부 쑨중산의 유훈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로지 장차 중화를 진흥시킬 책임을 가진 제군들은 자신의 어깨에 그 책임을 짊어져야한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만약 10억 명의 중국인들의 복지를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의연하게 이 시업에 투신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린이푸가 대륙으로 투신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그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해보자. 1975년 린이푸는 대만 육군군관학교의 정기 44기 보병과를 전체 2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즉시 소대장이 되었다. 다음 해에 국방부의 장학금을 받고 정치대학의 기업관리연구소에 입학하게 되었다. 1978년 정치대학의 기업관리 석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그런 뒤 곧 바로 군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최전방 진먼다오에 배치되었다. 육군 대위로 중대장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그의 임무는 외빈들이 방문할 때 최전선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그가 속한 ‘마산중대(馬山連)’는 사단에서 최정예 중대였다. 이 중대는 모두가 정예군으로 선발되었고 장비와 복지 수준도 최고였다. 이 중대에서 린이푸는 최고우등생이었다. 이곳은 진먼다오에서도 중국대륙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다. 썰물이 되면 직선거리로 겨우 2~300미터에 불과했다. 망원경을 통해서 보면 건너편 대륙의 군민들의 활동을 모두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이곳은 진먼다오를 방문하는 외부 손님들의 접대하는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린이푸는 단파라디오를 하나 샀다. 그는 저녁마다 주변이 모두 조용해지면 대륙의 방송을 듣게 되었다. 그는 멀리 대안의 불빛들을 보면 마음이 울렁거렸다. 대륙에 대한 무한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대만해협이 병풍처럼 막혀 있고 더욱이 양안의 인민간의 골육상쟁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동안 오랜 기간 생각해온 ‘대중국사상’을 실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당장 변화시킬 수도 없었다. 그는 대륙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린이푸는 사람들에게 듣기를 10년 전에 어느 소대장이 진먼다오 텐마산(天摩山)에서 대륙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소대장은 오리발을 신고 수영해서 건너갔다는 이야기였다.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헤엄을 치던 저녁에 어느 음식점에서 녹두탕 한 그릇을 먹고 갔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뒤 다음날 아침 일찍 대륙 쪽에서 스피커로 대만의 소대장 한명이 귀순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린이푸는 다시 깊은 생각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속으로 힌트를 얻게 되었다. 심사숙고 끝에 그는 모험을 하기로 하였다. 린이푸는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였고 평상시 농구를 좋아하였다. 농구실력은 발군이었다. 린이푸가 사라진 날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979년 5월 16일 저녁 무렵 린이푸는 ‘가짜연습명령’을 하달하고 통행금지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중대 전달병에게 연해 각 초소에게 전달하길 마산방송센터에서 대만의 관병들이 늦은 밤 수영훈련을 할 것이니 대륙 쪽에서 수영하는 사람을 발견하더라도 사격하지 말라고 방송하였다. 린이푸는 이렇게 하여 수영으로 안전하게 대륙으로 건너갔다. 대륙 쪽에서 총소리가 한번 들리기는 했지만 정말로 조준 사격을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수영하여 귀순한 인물이 바로 명령을 하달한 린이푸였다. 그날 밤 진먼다오 초소에서는 린이푸의 실종사건이 발생하자, 전 군대가 출동하여 수색 작업을 벌였다. 대만군은 군기밀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작전계획을 수정하였다. 이틀 후에는 진먼다오 전 수비부대가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소문은 린이푸가 농구공 두 개에 의지하여 해협을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바르게 퍼졌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2008년 3월 7일, 린이푸 부부가 기자회견상에서 그것은 소문이고 실제로 린이푸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으로 지금까지도 2000미터 이상을 주파하는 실력을 가진 인물로 알려지면서 소문이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런데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왜 린이푸는 중국 대륙이 1979년 5월부터 덩샤오핑에 의해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던 시기에 귀순을 했는가? 본인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해석을 내린 적이 없다. 린이푸는 당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대만을 버리고 수영으로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국대륙으로 왔다는 점이다. 불가사이한 일이었다. 대만 군부는 2002년에 가서 비로소 린이푸가 바로 1979년 대륙으로 ‘월북’한 린정이(林正義) 대위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아울러 그에 대해 조국 대만을 배반하고 투항한 죄명으로 그에 대해 수배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린이푸는 체포령으로 인해 해외에 여행을 하는데 영향을 받은 적도 없다. 더욱이 대만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대만정부는 특별한 처벌을 하지 않았다.(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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