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아시아 최고의 안무가, 린화이민(林懷民)
<중국, 중국인>아시아 최고의 안무가, 린화이민(林懷民)
  • 한인희
  • 승인 201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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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의 아름다움 탄복…대만 제일 문화수출품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는 다양한 중국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중국의 고대 유물에 비해 중국 당대의 예술은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과거 중국이 세계를 향해 실크를 수출할 때 유교문명도 수출하였다. 다시 말해서 다량의 정신적인 산물도 수출했었다는 의미다. 더욱이 중국의 도자기와 원림 등은 서양인들이 미친 듯이 좋아했었다. 또한 중국의 회화와 서예는 일본에서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받기도 했다. 오늘날 윈먼우지의 무용도 서양의 예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분명 서양의 젊은이들에게도  지혜를 불어넣고 있다. 린화이민의 예술은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 따라서 린화이민은 ‘현란한 중국 문화수출의 역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11월 24일 <난팡렌우저우칸(南方人物周刊)>의 리나이칭(李乃清 )기자는 린화이민을 만나고 그의 행동거지에 매력을 느낀다. 그 취재 내용을 참고해보자. “린화이민의 싸인은 ‘화이(懷)’자를 마치 긴소매를 휘젖듯한 느낌으로 갈겨쓴다. 그러면 원만하고 친근한 느낌이 감돈다. 그리고 ‘민(民)’자의 마지막 한 획은 마지막으로 누르면서 길게 뽑아 재낀다. 그런 뒤에 힘을 내서 위로 쳐올린다. 쪽 바르게 올린다. 그 기세가 맹렬한 각을 세운다.” 그의 이름에서 중국 전통의 서예를 오버랩 시킨다. 린화이민이 고백한다. “내가 젊은 시절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은 어느 날 거리를 가고 있을 때 땅바닥을 쿵쿵거리며 마치 밟아버릴 듯이 걸어가면 땅에 구멍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지만 당시의 느낌은 오늘날처럼 외부세계로부터 기(氣)를 가지고 이곳을 내리누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무용에서 ‘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93년 린화이민은 ‘윈먼우지’를 이끌고 중국 대륙에서 최초의 <신주안(薪傳)의 순회공연을 가졌다. 공연을 본 중국 대륙의 무용계가 놀랐다. 그는 이어서 <대나무의 꿈(竹夢)>, <백사전(白蛇傳)>, <홍루몽> 등의 고전작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2009년 11월 ‘윈먼우지’는 중국 대륙에서 7차례에 걸쳐서 공연을 가졌고, 2001년에는 그 유명한 <해초1>을 6개 도시의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는 춤과 서예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서예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신체의 행위이다. 그것은 발레의 1, 2, 3, 4가 아니다. 그 안에는 기의 장단이 있다. 곡선이 유동하면서 허실을 추구한다. 이러한 무용 예술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기운생동’(氣韻生動 : 글씨나 그림 등의 기품·품격·정취가 생생하게 약동하는 것을 말함)이라고 부른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상하이의 둥팡(東方) 예술센터에서 특강을 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의 무용단의 무용수 두 명을 대동하고 등장하였다. 즉흥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현장의 관중들로 하여금 ‘윈먼우지’의 수련과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찍이 1990년부터 ‘윈먼우지’는 린화이민을 따라 정좌 수련법과 권술, 태극권 도인법(導引法 : 도가(道家) 양생법의 하나. 정좌·마찰·호흡으로 온몸의 근육과 관절을 조절하여 모든 병을 물리친다고 함) 등에 몰두하였다. 린화이민은 당시를 회고하며 “처음 시작을 하자마자 무용수들은 나를 무척 원망했다. 왜냐하면 도약, 고통스런 훈련이 이어졌다. 마지막에는 마루 바닥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좌선을 한다.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40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거치고 난 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쾌락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들의 중국인의 유전인자였던 것이다.” 2000년부터 시작하여 린화이민은 당시 유명한 서예의 대가들을 초빙하고 ‘위먼우지’의 무용수들에게 정기적으로 서예를 연습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순간순간 온몸으로 새로운 세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 장면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왕희지와 회소(懷素)의 글씨들은 모두가 당시 그들의 붓을 들고 춤을 추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마음속에 남아있는 흔적이었다.” 린화이민은 붓글씨를 수련한 기초 위에 무용수들에게 다시한번 글씨를 확대하여 무대에 투영시켜놓고 그들이 느끼는 대로 즉흥적인 감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이는 마치 ‘한 무리의 젊은 무용수들과 오래된 글자의 혼이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오래 가공을 하면 농익고 마침내 향기를 내뿜게 되는 원리였다. “<행초2>에서는 여백을 강조하였다. 송대의 도자기 문양을 확대하여 투사시켜 놓았다. 가볍고 부드럽게 도자기를 어루만지면서 무용수들은 변화무쌍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광초>에서는 서예의 가장 기본인 화선지와 먹물을 찾느라고 고생하였다. 이러한 소품을 찾는데 무려 10개월이 걸렸다. 공장을 찾아서 거칠기 한량없는 종이 섬유를 생산해 냈고, 먹물은 위에서 흘러내리면서 꿈틀거리며 가도록 하였다. 마침내 무대 위에서는 무용수와 그림이 함께 연기를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다.” 린화이민의 ‘행초삼부곡’은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에게도 깨우침을 주었다. <뉴옥 타임즈>는 “이것은 무용이 얼마나 뛰어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가장 잘 증명해주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린화이민은 지난 날의 영광에 대해 절대로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이전의 작품은 더 이상 공연을 하지 않는다. 다만 ‘윈먼’을 운영하기 위하여 반드시 공연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과거 작품에 대해서 그다지 애착이 없다. 그것들을 보면 나는 ‘이 아이가 매우 총명하고 매우 귀엽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그러한 작업은 이미 지나간 일에 불과하다. 나는 잊지 못해하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공간을 버리고 다시 만들고 재미있는 일이 새롭게 생기는 것이다.” <홍루몽>에서는 주인공 바오위(寶玉)가 녹색 바지만을 입고 핑크빛의 꽃비가 하늘 가득 내리는 가운데 춤을 춘다. 그 작품을 보고 있으면 청춘의 순결이 얼굴로 다가온다! 그가 이러한 작품들을 만드는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주변의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는 5살대에 이미 부모와 삼촌들 고모들과 함께 1948년 영국에서 만든 영화 <붉은구두(紅菱艶:The Red Shoes)를 보러갔다. 집에 돌아온 뒤에 그는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였다. 그는 “오늘까지도 옛날 영화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나는 뭐든지 다 기억을 한다. 사실 내가 최근에 그것을 한번 보았는데 그것이 11번째 본 것이었다. 그 빨간 구두는 실제로는 무용인들을 상징하는 ‘은유’였고 춤을 추는 사람은 동작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무용을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밥 먹는 것도 많은 동작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몸이 이러한 것을 느꼈다!”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어릴 때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언제나 전체 사회문제를 이야기하셨다. 젊을 때는 이러한 생각에서 너무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보니 그의 교육은 나의 몸에 베었고, 결국에는 발효가 되었던 것이다” 대학을 다닐 때 부친이 린화이민에게 물었다. “너의 인생의 꿈이 무엇이냐?” 그는 “책을 많이 쌓아둔 서점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음악을 마음대로 듣고 차를 마시고 싶으면 차를 마시는 것 이러한 생활이 너무도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셨다. “창피한 놈 같으니! 네가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는 놈이구나!” 당시 린화이민은 “나는 힘들었고 화도 났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님이 나에게 관념을 불어넣어준 것이었다. 그것이 나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하였다. 그것이 그의 성공에 바탕이되었다. “부친은 내가 윈먼을 만들었을 때 내게 말씀하시길 ‘춤추는 사람이 예술가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러나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무용은 아마도 거지처럼 쪽박을 찰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잊지 마라’라고 충고도 해주셨다. 매번의 리허설에 아버지께서 참관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무용 속에서 많은 사상적인 차원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윈먼이 오래 유지하게 된 이후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제가 린화이민의 애빕니다’라고 하셨다.” 1981년 린화이민은 ‘윈먼우지’를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나섰다. 90일동안 72개 도시에서 73번의 공연을 가졌다. 대단한 성황이었다. 1982년 파리의 퐁피두아트센터에서 공연하였다. 당시 언론 매체들의 평가는 “이 대만에서 온 현대무용단이 국제무용페스티벌을 살렸다!”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작업들은 조그만 나라 대만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수출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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