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 20세기 중국 최고의 서화가, 치바이스 下
<중국, 중국인> 20세기 중국 최고의 서화가, 치바이스 下
  • 한인희
  • 승인 2011.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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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대 중국학과교수

중국화를 상징예술의 극치로 이끌다

쉬페이홍과 만남·평가통한 확실한 명성 얻어
작품속 당시 사회상 풍자 통한 고민·의분 표현
부지런한 화가…1953년 한해 작품 6백여점

치바이스는 1919년 55세 중년의 나이에 비로소 베이징에 거주할 수 있었다. 그는 전각과 그림으로 입에 풀칠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생 중에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친구가 바로 천스쩡(陳師曾)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후인들은 ‘천스쩡이 없으면 치바이스도 없고, 치바이스가 없으면 천스쩡도 없다’라고 할 정도로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였다.
천스쩡은 당시 새로운 사조가 물밀 듯이 밀려올 때도 중국 회화계에서 꿋꿋하게 전통을 고수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문인화의 가치』라는 책을 집필하여 이 의미를 밝힌 적이 있다. 이러한 구닥다리 같은 천스쩡은 치바이스에게 여러 차례 격려와 가르침을 주었다. 이러한 정신 하에 치바이스는 의연하게 10년간의 노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때로부터 그의 그림의 특징은 더욱 두드러졌고 사람들이 익숙한 면모가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치바이스의 예술은 이미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부단히 당시의 대가들인 우창시(吳昌碩), 황빈훙(黃賓虹) 등의 작품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기교를 더욱 가다듬었다.
그는 늦은 밤까지 전각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서예를 연습하였다. 그는 수 만 번의 반복된 연습과 시련을 거치면서 전각, 시사, 서예, 회화에서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1937년에 발생한 항일전쟁 이전 10년 동안 이미 만폭 이상의 그림을 그렸고, 3천개 이상의 전각을 하는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베이징에 살게 되면서 말 그림으로 유명한 쉬페이홍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주요한 전환을 맞게 된다. 
1929년 9월 쉬페이홍은 당시 베이핑예술학원 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취임한 지 얼마 뒤 당시로서는 무명이었던 치바이스를 교수로 초빙할 계획이었다. 이 해 12월 어느 날 오전 쉬페이홍은 베이징의 시단(西單)의 콰둥후통(跨東胡同)의 치바이스 집으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오래된 친구처럼 오히려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쉬페이홍은 치바이스에게 베이핑예술학원의 교수를 초빙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였다. 치바이스는 쉬페이홍은 한번 힐긋본 뒤 미소를 지으면서 완곡하게 사절을 하였다. 몇 일 뒤 쉬페이홍은 재차 치바이스 집으로 갔다. 그러나 치바이스는 또 다시 쉬페이홍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쉬페이홍은 절대로 낙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마침내 치바이스를 설득하였다. 치바이스는 “내가 학당에서 책을 조금 읽었을 뿐이고 초등학생도 가르쳐 본적이 없는데 어찌 대학생을 가르칠 수가 있겠는가?”라고 쉬페이홍에게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쉬페이홍은 “선생님께서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시범만 보이셔도 됩니다”라고 그를 격려하였다. 이처럼 치바이스의 그림에 대해 쉬페이홍이 “정교함이 자연스럽고 혼연일체가 이루어졌다”라고 극찬을 하였지만 당시 중국 미술계의 일부 인사들은 그를 목공출신이라고 폄하하였다.
쉬페이홍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전시회에서 당시 치바이스의 작품은 인기가 없어서 사람들의 눈길이 잘 가지 않는 구석에 걸려 있었다. 쉬페이홍은 치바이스의 <새우의 정취(蝦趣>를 본 뒤 “정말로 묘한 정취가 넘치는 걸작이구만!”라고 하면서 전시 책임자에게 이 작품을 전시장 중앙에 자신의 작품과 함께 걸도록 지시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림 값이 8위엔에서 80위엔으로 10배가 뛰었다. 쉬페이홍 자신이 그린 그림 <분마(奔馬)>는 70위엔이었다. 쉬페이홍은 치바이스의 <새우의 정취> 작품 아래에 ‘쉬페이홍이 가격을 매긴 것’이라고 직접 썼다. 이 일로 전시회는 난리가 났고  치바이스는 이 일로 베이징에서 확실하게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7년부터 치바이스는 국립베이핑예술학교와 징화(京華) 미술전과학교의 교수로 초빙이 되어 강의를 하면서 후진들을 길렀다. 이후에 유명한 화가들인 위페이안(于非闇), 왕쉐타오(王雪濤), 리쿠찬(李苦禪) 등이 모두 치바이스의 제자였다. 1937년 항전이 시작되었을 때 치바이스는 70여세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일본군에게 함락된 베이징 시내에 살고 있었고 정신적인 고통도 너무 컸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와도 왕래를 하지 않았다. 베이핑예술학원의 교수직도 사직하고 공개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연회에도 가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 침략자나 매국노들이 이 기회를 빌어 준동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에 대한 우려때문이었다. 그는 “바이스 노인이 심장병이 재발하여 손님을 맞는 것을 중단하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러한 방법으로라도 일본에 대해 저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늙은 예술가가 마지막으로 민족정기를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 일본침략자와 매국노들이 그의 낙관을 갖기 위해 그의 화실을 뒤지고 난리를 쳤지만 그의 당당한 기세에 압도당해 어찌 하지를 못하였다.
그는 당시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의 고민과 의분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1944년 그는 <군서도(群鼠圖)>에서 제자를 쓰면서 “쥐들이 모여 있네, 어찌 이리도 많고 어찌 일도 시끄러운가? 벌써 내 과일을 물어뜯었네. 또 내 기장쌀도 모두 훔쳐갔네 그려! 촛불 타는 일이 몇일 남지 않은 것을 보니 엄동이지만 벌써 새벽알리는 오경 북소리가 들리네”라고 하여 일본의 통치가 막을 내릴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비난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또한 수묵화로 게를 그리면서 그림의 시제에 “가는 곳마다 풀과 진흙일세. 옆으로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작년에는 군자들이 많이 보이드니, 올해는 어찌 보이지가 않구만”이라고 하여 비유하여 일본의 침략을 비난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은 보기에 좋다. 예를 들면 새우 그림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투명하게 그리면 잘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치바이스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새우를 그리면서 세상의 암투를 풍자한다. 이러한 그의 화제시에서 더욱 많이 등장한다. 이럴 경우 그의 화제를 설명하는 시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을 풍자한다.
치바이스는 중국 당대 화가 가운데 중국화를 상징예술의 극치로 끌어 올린 인물로 평가한다. 그의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매우 간략하고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가장 많은 함의를 주고 있다고 평한다. 중국화를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은 중국화가 오로지 기술적인 측면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치바이스는 함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1949년 1월 31일 베이핑이 해방이 되던 그 날, 완전히 구사회와 단절을 하던 시기에 85세의 치바이스는 고령임이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와 환호하였다.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 그는 중앙미술학원의 명예교수를 담당하였고 또한 중앙문사관의 관원을 지냈다. 중국문학예술연합회 주석단 위원, 중국화연구회와 중국미술가협회의 주석을 담당하였고 중국화원 명예원장이 되었다.
1952년 그는 아시아태평양지역 평화회의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대형의 백합과 평화의 비둘기를 그렸다. 1953년 치바이스는 일반적으로 허세(虛歲)라고 하는 90세의 생일을 맞이했다. 중국미술가협회와 중앙미술학원이 그를 위해 성대한 축하모임을 마련해주었다. 1956년 세계평화이사회는 치바이스를 1955년도 국제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그는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마음이 황량해지고, 5일 동안 전각을 하지 않으면 손이 가렵다” 라고 한 성실하고 부지런한 화가였다. 치바이스의 창작품은 너무도 많아 사람들의 놀라게 한다. 1953년 한 해 동안에만 그린 그림이 6백 여 점이 넘었다.
1957년 9월 16일 치바이스는 베이징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세였다. 전 중국인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베이징인민출판사는 그의 시사, 전각, 서예, 회화 등을 정리하여 『치바이스작품집(齋白石作品集)』을 출판하였고, 『백석시초(白石詩抄)』 8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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