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중국문화계의 최고지도자, 궈머뤄 下
<중국, 중국인>중국문화계의 최고지도자, 궈머뤄 下
  • 한인희
  • 승인 201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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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대 중국학과교수

“당신은 사회주의시대 신중국의 괴테입니다”

공산당 가입… 장제스 폭로글 발표 후 日도피
中 고대사 연구 집중, 학문적 성과 드러나
저명한 과학자 공동 中과학원 산하 대학 설립

궈머뤄의 학문적인 열정은 중단되지 않았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역사극, 왕소군(王昭君)』 등을 창작하는 등 그의 지적인 샘물은 마르지 않고 넘쳐흘렀다.
1927년, 그는 이제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장제스로부터 국민당 입당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하였고, 국민당도 그를 포섭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기로에서 그는 중요한 선택을 강요받았다. 당시에 누가 보아도 희망적인 국민당을 포기하고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하는 공산당을 선택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해에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입당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4·12’사변 직전 ‘오늘의 장개석을 보시라!’라는 글을 발표하고 장제스가 ‘국가와 민중, 그리고 혁명을 배반하였다’라는 점을 폭로하였다. 이어서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당일이 되었던 ‘8·1’ 난창(南昌)봉기에 직접 참가함으로써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로부터 받은 수모를 참을 수 없어 체포령을 내렸다.
1928년 궈머뤄는 일본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열정을 중국고대사와 고문자학 연구에 집중하였다. 비로소 그의 학문적 성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연구는 중국의 고대사회를 규명하는데 학문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대한 성과가 바로 『중국고대사회연구』였다. 이 책은 맑시즘의 시각에서 중국 고대의 어로수렵, 목축과 교통, 무역 등의 생산 활동을 논증한 명저다. 그는 중국의 고대사에 나타난 가족관계, 정치조직 등 사회구조와 『시경』과 『상서』등의 고전에 기록된 요순시대에서부터 상과 주나라 시대까지의 사회형태를 분석한 의미 있는 저작이었다. 다시 말해서 중국 사회가 어떻게 하여 모계사회에서 노예제 사회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논증했다. 주목할 것은 유물사관을 동원하여 중국 고대사회의 역사발전을 연구한 개척자적인 저술이었다. 후인들이 궈머뤄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파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함께 주목할 연구로 ‘갑골문’연구이다. 그의 저서 『갑골문자연구(甲骨文字研究)』가 발표되자 학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궈머뤄는 중국의 갑골문과 금문(金文) 연구에 주력하였다. 갑골문이 발견된 은허(殷墟)에서 발굴이 시작된 1928년부터 중일전쟁으로 중단될 1937년까지 그는 계속하여 ‘갑골’과 관련된 저서를 발표하였다. 이를테면 『복사통찬(卜辭通纂)』, 『양주금문사대계도록고석(兩周金文辭大系圖錄考釋』, 『고대명각회고(古代銘刻匯考)』, 『은계졸편(殷契粹编)』등 10여권의 저작을 속속 출판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창조적이었다. 그는 고문자, 고기(古器)연구와 중국의 고대사회 연구가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규명하면서 유물사관적인 역사학연구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를 통해 갑골문과 서주와 동주시기의 청동기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특히 고문자학과 고고학 영역에서 새로운 성취를 이루어냄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의 정치부 제3청 청장을 역임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문화공작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줄곧 책임자인 주임을 맡았다. 명실상부하게 문화계의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된 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에 간여하게 되었다고 학문에 손을 놓지 않았다. 천성이 학자였던 그는 이 시기에도 역사연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저작인 『청동시대(青銅時代)』와 철학서 『십비판서(十批判書)』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연구 방법을 보면 선진시기 제자백가를 연구하기 위해 먼저 관련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고, 다음으로 당시 시대와 사회의 일반에 대한 상황을 명백하게 밝힌 다음, 어느 학설이 등장하는데 필요한 사회적인 기초를 찾아낸 뒤, 학설과 학설간의 관계와 영향을 고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 학설이 당시 사회발전에 순기능을 했는지 아니면 역기능을 했는지를 규명하는 방법으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치학(治學) 방법이었다.
그가 정치를 하게 된 것은 많은 평가가 있다. 그러나 당시 국난 극복을 위한 위기시기에서의 나름대로 그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항일전쟁이 끝난 뒤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1946년 민주운동 전열에 앞장섰다. 1948년 남경국민정부의 최고의 학술연구기관인 중앙연구원 초대 원사 직으로 초청되었으나 그는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의 처심을 보면 철저하게 국민당과의 단절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에 그는 문학창작에 전념하였다. 『채문희(蔡文姬)』, 『무측천(武則天)』등 역사극을 창작하였고, 『노예제시대(奴隸制時代)』등을 저작하여 중국 역사시기 구분에서 노예제 시기와 봉건제시기의 경계를 춘추전국 시기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궈머뤄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자. 중국의 문화계에서는 그를 ‘중국의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라고 불렀다. 문예이론가인 저우양(周揚)은 궈머뤄에게 “당신은 괴테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회주의시대 신중국의 괴테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중국 극작가인 싸예신(沙葉新)은 엥겔스의 괴테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면서 궈머뤄는 ‘위대한 천재이자 평범한 공민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상대적으로 전문적인 연구자들은 그를 극도로 추앙하지만 일반적인 사회 민중들 가운데는 궈머뤄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성격과 심리를 오해하거나 이 천재형의 인재를 경시하는 경향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궈머뤄는 여러 명의 애인이 있었다. 호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와 사귄 사람을 보면 안린(安琳)으로 불렸던 펑이란(彭漪蘭)으로 그녀는 혁명전쟁 기간 중 ‘국제가(The Internationale)’를 저음으로 잘 부르는 유명한 여자 혁명가였다. 궈머뤄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반하여 그녀와 사귀었다. 그리고 부인 위리췬(于立群)의 동생이었던 위리천(于立忱)과도 사귀었는데 이후 그녀가 자살하자 그의 자살에 원인 제공을 하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또한 당시 ‘상하이의 전기적인 여자’로 알려진 공산당원은 황딩훼이(黃定慧:이후 黃慕蘭으로 개명함) 등과 염문을 뿌렸다. 궈머뤄는 여성관계가 복잡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궈머뤄는 중국과학기술대학(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of China)의 주요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중국과학원의 원장으로 재직하던 궈머뤄는 1958년 5월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실현하고 국방건설과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필요한 전문 인재를 배양할 목적으로 저명한 과학자들과 공동으로 중국과학원 산하의 대학 설립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당시 지도자들인 류샤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지지를 받아 1958년 9월에 정식 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업적이었다.
궈머뤄는 1958년부터 1978년 6월 12일 베이징에서 병으로 서거할 때까지 20여년간 이 대학의 총장을 겸임하였다. 이후 1980년 2월 25일 국무원은 중국과학기술대학에 15만위엔을 출연하여 ‘궈머뤄장학금’을 설치하였다. 이는 신중국 성립 이후 최초의 장학금이었다. 그의 공로를 기린 것이었다. 그의 연구 업적은 『궈머뤄전집(郭沫若全集)』에는 문학편 20권, 역사편 8권, 고고학편 10권이나 된다. 아직도 출판을 기다리는 500만자 이상의 번역서 등이 있다. 그의 저작은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는 중앙의 주요직책을 맡기도 하였는데 중앙정부위원, 정무원부총리 겸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중국과학원장 등 정부의 문화관련 주요직책을 대부분 맡을 정도로 중국 문화 분야의 최고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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