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중국문화계의 최고지도자, 궈머뤄 上
<중국, 중국인>중국문화계의 최고지도자, 궈머뤄 上
  • 한인희
  • 승인 2011.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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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대 중국학과교수

“나는 거의 매일 시 속에 도취돼 있었다”

부친의 열정적 교육열 속 유복한 어린시절
日유학서 서방문학 영향 신문화운동 참가
마르크스주의 접하며 무산계급문학 제창

궈머뤄(郭沫若)는 중국 현대의 저명한 학자다. 그의 이름 앞에는 문학가, 역사학자, 고문자학자, 사회활동가 등이 붙는다. 사회주의 중국이 성립된 이후에 중국인들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지식인은 루신(魯迅)이다. 그 이후를 이은 사람이 바로 궈머뤄다. 그만큼 궈머뤄는 1978년 6월 12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 지식인 최고의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는 1892년 11월 16일 쓰촨성의 뤄산(樂山) 싸완전(沙灣鎭)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아명은 원바오(文豹)로, ‘표범이 환생하다(豹子投胎)’라는 의미였다. 임신을 했을 때 어머니가 표범에게 엄지와 검지사이를 물리는 꿈을 꾸었던 때문이었다. 학명은 카이정(貞開), 호는 상우(尙武)였다. 그는 24살이 되던 1916년 고향 싸완의 두 강인 ‘머수이(沫水)’와 ‘뤄수이(若水)’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을 ‘머뤄(沫若)’라고 지었다. 이것은 뒤에 새로운 시를 발표할 때마다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조상들은 원래 푸젠(福建)의 링화시엔(寧化縣) 룽상샤리(龍上下里)의 치두(七都)로 오늘날 푸젠성의 링화시엔 스비쩐(石壁鎭) 출신이었다.
궈머뤄의 부친 궈차오페이(郭朝沛)는 자신이 배우지 못했음을 후회하여 자식들의 교육에는 남다른 열성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부모는 지주이면서 장사를 해서 꽤 부를 축적했다. 덕분에 궈머뤄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고향에 대한 추억이 일생 동안 그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의 고향집은 청두(成都)의 어메이산(峨眉山)의 둘째 봉우리인 수이산(綏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앞으로는 물결이 굽이치는 다두허(大渡河)를 바라다보는 매우 멋진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수이산은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고, 머수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아름답다[綏山毓秀,沫水鍾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수의 아름다움이 특별했다. 궈머뤄가 이처럼 수려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각이 탄생하고 남다른 재능과 시의(詩意)가 잉태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훌륭한 인재가 탄생되기 위해서는 주변의 환경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다.
어린 시절, 궈머뤄는 비상한 기억력을 자랑하였다. 4살 반부터 가숙(家塾)인 ‘수이산산관(綏山山館)’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가숙의 선환장(沈煥章)선생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낮에는 경을 읽고 밤에는 시를 읽었다. 이와 함께 일단의 신학문도 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받았던 교육은 그의 예술관을 형성하게 해주었다. 그에게 시가(詩歌)를 창작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그의 문화이념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06년 궈머뤄는 고향집 싸완(沙湾)을 떠나 더 큰 도시였던 뤄산과 청두에서 공부했다. 이 두 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20살이 되던 1912년 정월 대보름날, 부모님의 강요에 따라 글자를 모르는 구식여자 장징화(張琼華)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결혼을 불행이라고 생각했고 결혼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1914년 큰형 궈카이원(郭開文)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과학구국’의 이상을 품고 의학을 선택하였다. 루신이 센다이(仙臺)로 의학공부를 하러갔다가 문학가로 변신한 것처럼 궈머뤄도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도쿄 제1고등학교 예과를 다닌 뒤 오카야마(崗山) 제6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입학이 어려웠던 후쿠오카의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 의과대학을 다녔다. 10년 만에 어려운 의학공부를 마치고 마침내 의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의과대학 시절인 1916년 8월, 도쿄의 ‘성 누가 병원’의 간호사 사토 후미코(佐藤富子)를 운명처럼 만났고 그들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궈머뤄는 그녀를 안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카야마에서 동거를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궈머뤄는 독일어와 영문학 수업을 통해 많은 독일, 영미와 인도의 문학작품 및 서방의 철학관련 저작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들의 작품은 오랫동안 그를 억압하고 있었던, 그리고 잠자고 있던 그의 시정(詩情)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미 자연과학에 대한 학습과 연구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문학을 빌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표현해 내기 시작하였다. 서방의 계몽주의가 맹위를 떨치면서 등장한 과학과 민주를 체득하였다. 특히 스피노자(Spinoza,1632-1677)의 ‘범신론’은 그의 이성을 다시한번 깨웠다. 이때부터 진지하게 일련의 시회와 인문적인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시인 휘트먼(Walt Whitman,1810~1892)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휘트먼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중국어로는 ‘草葉集’으로 번역 출간됨. 시집 《풀잎》은 종래 전통적 시형을 벗어나,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찬미했다/주)을 읽자 더욱더 깊이 작품속의 격정에 감염되고 말았다. 자신을 장기간 억압하고 있던 마음 속의 열정이 마치 화산의 마그마가 분화구를 찾아 터지듯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지성에 목말랐기에 당대 최고의 지성들인 타고르, 섹스피어, 괴테 등의 작품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1921년 6월에는 청방우(成仿吾)와 위다푸(郁達夫) 등과 함께 ‘창조사(創造社)’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신문화운동에 참가했다. 마침내 1918년 봄에 출간한 《목양애화(牧羊哀話)>는 그의 최초의 소설집이었다. 1918년 초여름에는 《죽음의 유혹(死的誘惑)》라는 최초의 시를 썼고, 1919년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일본의 후쿠오카에서 구국단체 하사(夏社)를 조직하고 신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활동은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1919년 겨울부터 1920년까지 궈머뤄는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의 《시사신보(時事新報》부간(副刊)인 《학등(學燈)》에 처음으로 <해오라기와 가마우지(鷺鶿)>를 발표하였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종바이화(宗白華)가 궈머뤄의 글을 보고 ‘동방의 미래를 대표할 시인’이라고 극찬하고 ‘신작이 있으면 언제든지 보내라’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그의 시작에 있어 ‘폭발기’라고 할 수 있다. 뒤날 그는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나는 거의 매일 시 속에 도취되어 있었다. 매번 시를 발표할 때마다 마치 열병을 앓는 것과도 같았다… 때로는 시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는 한자도 쓰지 못했다. 내가 일찍이 말했듯이 ‘시란 쓰는 것이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들은 뒤에 그의 대표적인 시집 《여신(女神)》에 모았고, 1921년 8월 해태동도서국(海泰東圖書局)에서 출판되었다.
궈머뤄의 문학을 분석하는 학자들은 그의 대표 시집인《여신(女神)》이 중국 전통의 시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보여주었고 ‘5·4’의 시대 정신을 직접 체득하고 중국문학사에서 새로운 시풍을 열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시집은 당대의 가장 우수한 혁명 낭만주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23년 일본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창조주보(創造週報)》와 《창조일(創造日)》의 편집일 보면서 공산주의와 접하게 된다. 그는 1923년 후반부터 체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면서 무산계급문학을 제창하였다. 궈머뤄우의 1925년 저서 《마르크스의 공자 방문기》를 ‘마르크스와 공자가 일심동체임’을 입증한 명저이기도 하다. 이제 궈머뤄는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학습하게 되었으며 국내의 사회혁명에도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
1926년 3월 광둥대학 문과대학 학장으로 취임하고 그 기간에 중국공산당의 초기 지도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해 7월, 궈머뤄는 국민혁명군을 따라 북벌을 하게 되면서 북벌군 총정치부 선전과장과 부주임을 역임하였다. 그는 정치에도 흥미를 가졌던 문학가였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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