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중국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여배우, 완링위 下
<중국, 중국인>중국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여배우, 완링위 下
  • 한인희
  • 승인 2011.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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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대 중국학과교수

 “유언비어가 무서워요 유언비어가…”
 압박·고통속 그녀의 최후의 선택

1.28사변 피난 새로운 인연과 만남·갈등
세남자와 감정상 좌절·힘든 여론의 압력
 그녀의 충격적 죽음 30만명 ‘애도 물결’


상하이의 영화산업의 발달은 완링위를 유명배우로 키웠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도 피할 수 없었다.
1932년 완링위가 무성영화 배우로 크게 발전하고 있을 때 이른바 ‘1.28’사변이 발생하였다. 만주에서 시작된 일본의 중국 침략이 상하이까지 불이 번진 것이었다. 이때 상하이의 많은 부호들은 속속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완링위도 자신의 양녀와 남편 장다민과 함께 홍콩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그녀는 인생의 두 번째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비극도 함께 싹텄다. 그녀가 만난 인물이 바로 탕지산(唐季珊)이었다.
그는 당시 동남아에서도 유명한 부자였다. 특히 차 잎을 파는 사업으로 치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돈이 많아지자 당시 새롭게 등장하는 영화 사업에 투자하였다. 당시 그는 완링위가 소속된 영화제작회사인 렌화회사(聯華公司)의 거대 주주였다.
완링위는 탕지산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탕지산은 완링위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돈 많은 한량 끼가 농후해 주변에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 중 바로 완링위의 선배이면서 무성영화의 저명한 여배우 장즈윈(張織云)도 있었다. 완위링은 탕지산과 동거를 시작하였다.
탕지산은 광둥의 고향에는 본 부인이 있었다. 탕지산은 본부인과는 불화하고 관계가 소원했다. 처갓집은 광둥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부자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탕지산이 성공하였지만 당시만 해도 이혼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탕지산은 사업차 다니면서 당시 유명한 여배우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였다. 탕지산은 완링위가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춤을 이용했다. 그를 데리고 호화로운 댄스홀에서 춤을 추었다. 그는 여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완링위가 탕지산과 좋아지내고 있을 때 장즈윈은 마음속으로 매우 불편하였다.
장즈윈은 완링위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 나를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내일을 보게 될 거요.” 탕지산이 절대로 좋은 남자가 아니라고 충고하였다.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나 완링위는 이미 탕지산에게 빠져들었고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탕지산은 상하이의 신자루(新閘路)의 3층 자리 양옥을 샀다. 이 양옥 2층에서 완링위가 생을 마친다. 이 건물은 지금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완링위가 탕지산과 새로운 동거를 시작하였을 때 첫 번째 남자 장다민이 다시 나타났다. 완링위의 삶도 다시 풍파가 일게 되었다. 장다민은 자신과 8년을 동거한 여자가 다른 사람과 동거를 하는 것을 보고 화가를 참을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자신보다도 돈도 많고 실력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마음으로 부글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 질투와 한편으로 원한이 교차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나쁜 방법으로 완링위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재판을 청구한 것이다. 자기와 살 때의 재산문제로 법원에 고소를 하였고 법적인 문제가 완링위를 괴롭혔다.
장다민과 비교했을 때 탕지산은 훨씬 성숙하였고 사업 능력도 있었고 중년남자로 여자를 잘 알았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이 남자는 완링위에게는 독약과도 같았다.
이제 완링위는 세 번째 남자를 만난다. 그는 차이추성(蔡楚生)으로 당시 재능 있는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완링위과 같은 동향인이었다. 차이추성이란 인물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컴플렉스가 컸던 인물이었다. 당시 상하이의 유명 감독들은 대부분 이른바 ‘서양 물’을 먹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차이추성은 상점의 점원 출신이었다. 그리고 영화판에 뛰어들어 잡일을 하고 스스로 배운 인물로 나중에 감독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오히려 완링위과 빠르게 가까워지도록 했던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모두 광동출신으로 취미가 같았고 출신배경과 생활습관이 같아 서로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상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드러내 놓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완링위의 허탈함을 달래주는 관계였다.
1984년 차이추성 감독이 세상을 떠난 이후 저명한 작가이자 영화계의 원로인 커링(柯靈)이 중국영화제전에서 처음으로 완링위와 차이추성과의 사랑이야기를 털어놓아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완링위와 3명의 남자들의 서로 갈등을 겪었을 때 영화 <신여성>으로 인해 연예 기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기자들은 주연배우인 완링위를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완링위의 죽음에 관한 실마리가 풀린다. 완링위는 세 남자와의 감정상의 좌절과 기자들의 공격이라는 두 가지 압력 하에 1935년 3월 8일에 그녀는 자살로 세상을 마무리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유서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왜 그녀는 3월 8일에 죽었는가? 그녀는 정말로 자살했는가? 등등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당시 사람들은 탕지산이 그녀의 유서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공개하도록 요구하였다. 탕지산은 내놓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것은 완링위가 나에게 준 마지막 물건이라서 절대로 내놓을 수 없고 내가 보관해야 할 것 같다”라고 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유서를 공개하도록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마침내 완링위의 유서가 공개되었다. 유서의 일부 내용 중 완링위는 “지산, 사랑해요. 저는 당신과 오랫동안 행복하길 바랍니다. 제가 떠난 뒤에 당신이 모함을 당하지 않길 바래요. ‘유언비어가 무서워요. 유언비어가 무서워요’”라고 써 있었다.
이렇게 유서가 공개되자 모든 사람들은 완링위가 견디기 힘든 여론의 압력 하에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법정 문제로 그녀의 명예가 손상을 입고 비극적인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녀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뒤에 당사자들의 양심적인 고백과 중국영화 백년사의 자료들을 자세히 조사하면서 그것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완링위의 자살사건은 사회적으로 깊은 충격을 주었다. 그녀를 사랑하던 많은 이들의 따라서 그녀의 죽음이 ‘베르테르효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당시 ‘상하이희극영화연구소’의 샹푸쩐(項福珍)여사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샤오싱(紹興)의 영화팬이 그날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항저우의 렌화극장의 매표원 장메이잉(張美英)도 완링위를 애도하다 약을 먹고 자살했다. 3월 8일 하루 만에 5명의 여자가 자살했다. 그들의 유서는 “완링위가 죽었다. 내가 무슨 의미로 사는가?”였다. 1935년 3월 14일, 그녀의 장례식은 생전의 친구들의 모두 모였다. 거의 300명이었다. 오후 1시 10분, 당시 영화계의 유명배우인 진옌(金焰) 등 12명이 운구를 담당하였다. 그녀를 마지막 보내는 길에는 30만 명의 애도하였다. 미국의 <뉴욕타임즈>의 상하이 주재 특파원은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애도”라는 보도하였다. 당시의 모습을 그리면서 “행렬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몸에는 용포를 입고 있었다. 만일 중국에 아직도 황제 시대 말기였다면 황제도 장례식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당시의 상황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중국 무성영화 시기의 한 여배우의 삶을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 곁의 연예계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느 시대이건 연예인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은 인생을 연기하지만 삶과 연기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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