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 20세기 중국 화단 최고의 전기적인 화가, 장다첸 下
<중국, 중국인> 20세기 중국 화단 최고의 전기적인 화가, 장다첸 下
  • 한인희
  • 승인 2011.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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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대 중국학과교수

“화가란 자신이 곧 상제  만물 창조의 특권을 갖는 것”

해외생활서 피카소등 서양화가들과 교류
1948년 ‘추해당’통한 세계 위대한 화가로
1976년 타이페이 복귀 대작 ‘여산도’ 완성

 

1926년부터 그는 중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황산에 갔다. 이후 그는 일본의 동양화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황산화파의 시조’가 되었다.
일찍이 황쥔비(黃君璧)선생과 쓰촨 청두(成都)의 아미산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1941년 여름 돈황을 여행하였다. 돈황 막고굴의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309개의 동굴에 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위로는 북위시기 아래로는 서하(西夏) 시대의 천년의 벽화들을 일일이 모사하였다.
1944년에는 이렇게 모사한 벽화들을 청두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인도의 다지링(大吉嶺)에 거주하면서 아난다 석굴의 벽화를 모사한 뒤 홍콩에서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 이후 그는 해외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브라질로 거주지를 옮기고 아울러 상파울루 부근의 작은 마을에 약 5만평에 달하는 ‘팔덕원(八德園)’을 건축하였다. 가산을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고 정원을 꾸몄다. 뒤에 일본의 동경 및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서 서화와 벽화 전시회를 가졌다. 이 시기 서양화의 대가 피카소와도 교류하였다. 이른바 ‘동장서피(동양은 장다첸 서양은 피카소의 약칭)’라고 불렀다.
1948년 그의 그림 ‘추해당(秋海棠)’으로 ‘뉴욕국제예술학회’에서 세계 위대한 화가에 선정되어 상금과 기념패를 받았다. ‘전 세계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추천사를 들었고, 세계의 언론들로부터 ‘당대 세계 최고의 중국화의 대가’라는 칭호를 들어 중국인들의 자랑이 되었다. 1949년 장다첸은 인도로 전시회를 하러 갔다. 세계 각지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서방 예술계에서는 그를 ‘동방의 붓’이라고 칭송하였다.
장다첸의 회화 예술은 세 시기로 구분한다. 즉 고전기, 전환기, 절정기다. 60세 이전까지 장다첸은 중국의 쓰타오(石濤) 등 송과 원의 대가들의 작품과 돈황의 벽화를 임모하는데 모든 정력을 집중하였다. 따라서 그의 화풍은 쓰타오에 매우 가까웠고 중국의 진(晉), 당(唐) 송원(宋元)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중국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시기였다. 그러나 60세에서 70세까지 10여년은 발채(潑彩)를 융합한 발묵과 구춘법(勾皴法:동양화에서 산, 암석, 폭포, 나무들을 가벼운 터치로 그리는 방법)에 천착하면서 마침내 웅장하고 장엄한 새로운 풍모를 창조해 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70세에 그린 <장강만리도(長江萬里圖)>가 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예술 생애 최고봉인 창조의 절정기에 진입한다.
그의 발채는 가장 개성적이고 독특한 화법이었다. 그 과정은 대략 먼저 묵필로 대체적인 형태를 구상한 뒤 종이 한 장을 더 붙여서(혹은 아예 한 장을 덧붙인 종이 위에) 다시 발묵과 발채를 한다. 그 발법은 마치 현대 서양회화의 자동 기법과 비슷하며 손으로 화선지와 화판을 끌어당기면서 묵채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반추상적이거나 묵채가 서로 엉기면서 새로운 경지와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이미지 밖에서 초월하고 그 안에서 새롭게 얻는다’거나 ‘색깔의 이합집산의 순간, 음에서 양으로 변한다’라는 옛 사람들의 논리로 이들 작품을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법이 전통 미학의 원칙에 부합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장다첸이 이처럼 말년에 화풍이 변화한 것은 그의 예술이 고전화풍에서 출발해 현대적인 화풍으로 향하였기에 그를 중국화 혁신의 대가 반열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는 환갑의 나이에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노력파였다. 그의 삶의 태도는 ‘70%는 인간이 하고, 나머지 30%만이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서 부지런히 노력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이가 들었음에도 서화를 연구를 계속하고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1977년 미국에서 대만으로 돌아와 와이슈앙시(外雙溪) 부근에 마야징쓰(摩耶精舍)를 지어놓고 만년을 보냈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자. 그는 “화가란 자신이 곧 ‘상제’(하나님)다. 자신이 직접 만물의 모든 것들을 창조한다. 어떤 사람은 그림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천부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흥미가 있는 분야라면 그 길을 찾아가 그 분야 모든 노력을 경주하면 자연스럽게 성공할 수 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말하길 ‘30%는 인간이 하는 것이고, 70%는 하늘이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을 절대로 반대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거꾸로다. ‘70%는 인간이 하는 것이고 30%는 하늘의 뜻이다’는 것이 맞다. 천부적인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어린 장다첸의 그림을 보면서 신동이라고 했는데 대체로 성년이 된 이후에는 그런 말을 의도적으로 듣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하면 주변 사람 모두가 칭찬하고 부모가 총애하고 그러면 자신의 본래의 것들을 모두 잃어버기 때문이었다. 자기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이때부터 노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성공했다고 생각하겠는가? 현재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림을 그리려면 먼저 옛 사람들의 그림을 열심히 모사하고 선 하나 하나, 그리는 것도 열심히 해야 한다. 글씨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일일이 한 뒤에 사생에 모든 노력을 다해야한다. 사생은 먼저 물리를 이해해야 한다. 물건의 생태를 관찰하고 그것을 느껴야 한다. 반드시 여러 차례 그리고 쓰면서 틀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야한다. 화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는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에는 그것이 비가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면 비를 내리게 하고, 태양이 떠오르게 하려면 태양을 그리면 된다. 조화는 모두 내 손안에 있다. 결코 만물이 나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이쪽에 산봉우리가 하나 부족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 산봉우리를 하나 더 그리면 된다. 그쪽에는 돌무더기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그리면 된다. 마음속이 선경의 경지에 들어가고 싶으면 그림으로 선경의 세계를 그리면 된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자연을 개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옛 어른들이 ‘붓이 조화를 부리는 것은 하늘도 어쩔 수 없다’라고 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그림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전체적으로 화가는 그림 속에서 또 다른 천지를 창조한다. 어떻게 그리고 싶으면 그렇게 그리면 된다. 때로는 현실을 표현할 때도 있고 때로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취사선택은 모두가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대략 그림은 하나의 물건이다. 너무 똑같이 그려서는 안 된다. 그림은 사진과는 다르다. 사진과 똑 같으면 어찌 그림이라고 하겠는가?”
장다첸은 만년에 여전히 끊임없이 중국화의 개척과 창신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기초위에서 발묵, 발채, 발사 등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고 중국화가 새로운 활력에 진입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영향은 깊고도 심원하였다.
장다첸은 장기간 해외에 거주하여 애국심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특별했다. 1976년 타이페이로 돌아와 거주하면서 대작 <여산도(廬山圖)>를 완성한 이후 불행하게도 1983년 병으로 서거하였다. 향년 85세였다.
그의 저서로는『돈황석기(敦煌石記)』,『장대천화집(張大千畫集)』,『돈황화책(敦煌畫冊)』,『황산전후해시화책(黃山前後澥詩畫冊)』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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