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20세기 중국 화단 최고의 전기적인 화가, 장다첸 上
<중국, 중국인>20세기 중국 화단 최고의 전기적인 화가, 장다첸 上
  • 한인희
  • 승인 2011.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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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대 중국학과교수

“중국 전통화 화가들의 모범적 인물
  한여인과 이루지 못한 애틋한 이야기”

 

中화단 전기적 색채 강한 국화대사
발묵·발채 새로운 예술 풍격 시도
세월 따라 화풍 다양한 변화 맞아

 

장다첸(張大千)은 1899년 5월 10일 쓰촨성 네이장(内江) 안랑리(安良里)의 학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의 본적은 광둥성의 판위(番禺)다. 그가 태어나기 전, 모친이 꿈속에서 만난 노인이 작은 원숭이 한 마리를 보내주자 곧 태기가 있었고 다첸이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장정취엔(張正權)이었으나 그가 21살이 되었을 때 원숭이라는 의미의 위엔(猨)으로 고쳤다가 위안(爰)으로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늘 원숭이가 있었다. 그이 자는 지위엔(季爰)이다. 그의 호도 사연이 있는데 그가 결혼 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골치가 아파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였다. 겨우 100여일 동안 중이 되었다. 곧 환속한 뒤 불문에서 얻었던 법명 ‘다첸(大千)을 자신의 호로 삼게 되었다. 별호는 대천거사(大千居士)이다.
그가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집안 내력이었다. 그의 둘째형이 유명한 화가였다. 그의 형은 호랑이를 잘 그렸던 장산즈(張善子)였다. 그 집안에는 가난했지만 화실이 있었고 이름이 ‘다펑탕(大風堂)’이었다. 이후에 장다첸은 이를 자신의 호로도 사용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장기간 거주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47년 홍콩, 1949년 타이완, 1950년 인도를 비롯하여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지에서도 살았다. 그리고 파리와 뉴욕을 비롯하여 태국과 독일 등 세계 여러 나라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시기에 피카소 등 유명작가들과 교유하면서 피카소에게 용필법과 동양의 회화정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78년 다시 타이완으로 건너가 노년기를 보내고 생을 이곳에서 마쳤으며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관이 있는 옆에 장다첸의 개인 기념관이 있다.(台北市士林區至善路2段342巷2號) 이 기념관은 ‘마예징서(摩耶精舍)’라고도 부르는데 1976년부터 장다첸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1983년 85세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유족들은 소장품을 국가에 기증하였고 대만국립고궁박물원에서 이를 관리하고 있는데 관람을 하려면 미리 신청을 해야 한다. 1일 관람자 수를 제한하고 있다.
장다첸은 20세기 중국 화단의 가장 전기적인 색채가 강한 국화대사이다. 그는 회화, 서예, 전각, 시사에 모두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대가였다. 초기에는 옛사람들의 서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였고 특히 산수화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다. 이후 해외에 거주하면서 화풍은 중채(重彩)와 수묵이 융합 일체를 이루어 특히 발묵(潑墨)과 발채(潑彩)에 새로운 예술 풍격을 열게 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그러한 시도는 중국 전통화 화가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장다첸이 어릴 때 집안은 가난했다. 어머니와 형을 따라 그림을 배웠다. 이렇게 하여 회화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뒤에 충칭(重慶)에 가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였다. 18살이 되었을 때 장다첸은 형 장산즈를 따라 일본에 유학 가서 염직을 배우면서 그림공부도 함께 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장다첸은 상하이에 거주하였다. 이때 그는 그의 화가 인생의 결정적인 스승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저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인 증시(曾熙:1861-1930, 자는 季子,만년의 호는 農髯,호남 衡陽사람)와 리루이칭(李瑞清:1867-1920, 자는 仲麟,호는 梅庵、梅痴、阿梅,강서성 臨川사람, 청말 민초의 시인, 교육가, 서화가, 문물감정가로 중국 근대 교육의 중요한 기초를 다진 개혁가이자 중국 현대 고등사범 교육의 개척자에게 사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다.
장다첸은 두 은사의 영향으로 광범하게 당·송·원·명·청 중국 역대의 전통 회화를 공부하였다. 특히 스타오(石濤) 등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국내외의 화단에서 그를 ‘당대의 스타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의 화재(畵材)는 풍부하였다. 산수, 인물, 화조, 충어(蟲魚), 조수(鳥獸) 등 다루지 않는 주제가 없었다. 그는 특히 공필화(工筆畵)에 특기를 보였으며 연꽃을 세밀하게 그리는 데 독보적이었다. 1920년대 중국 화단에서는 형 산즈와 그를 ‘촉[사천]의 두 명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 그와 북방의 화가 푸루(溥儒:1895~1963, 자는 心畬,호는 西山逸士로 청 道光 황제의 증손으로 恭親王 訢忻의 손자이자, 載瀅 패륵의 둘째 아들로 산수화에 조예가 깊었다)를 중국화단의 ‘남장북푸(南張北溥)’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국립중앙대학의 예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쉬페이홍은 장다첸을 중국 ‘5백년 이래 최고의 화가’라고 찬양하기도 하였다. 장다첸과 한국과의 재미있는 인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까오홍옌(高紅顏)이 쓴 <장다첸의 한 시절 이국 연정(張大千的一段異國戀情)>이라는 글이다. “1927년 가을 중국 화단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장다첸은 일본의 골동상인 江騰陶雄의 초청으로 한국의 금강산을 유람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지춘강(池春紅)이라는 아리따운 한국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원래 가난한 집안 출신의 ‘기생’이었다. 江騰陶雄이 그녀를 장다첸을 전문적으로 보살피도록 부탁하였다. 장다첸은 춘강의 천진난만하고 한국 여성의 전형적인 헌신적인 태도에 마음이 크게 움직이게 되었다. 춘강도 수염을 기른 중국 청년 화가의 활달한 태도와 야만적인 일본인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다. 춘강은 장다첸의 마술 같은 붓놀림에 넋을 잃고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다첸이 쳐다보면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녀는 다첸이 그리는 그림을 곁눈질하면서 백설이 가득한 군산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그림을 그리는 장다첸을 마음속으로 깊이 흠모하였다.
다첸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또한 춘강도 중국말을 몰랐다. 두 사람은 손짓과 발짓, 표정으로 혹은 다첸이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의사소통을 하였다. 처음에는 두 사람은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몰라 서로 웃기만 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은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되었고 부지불식간에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다첸이 귀국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그는 춘강을 중국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이별 전, 다첸은 한국에서 판 그림 값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주고 서울에서 약국 하나 열어 살아가도록 배려하였다. 다첸은 떨어지기 힘든 발걸음을 돌려 중국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 겨울, 일본에서 중국화를 감정하던 장다첸은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고독하고 쓸쓸해지자 더욱 춘강이 그리웠다. 이때 간호사가 어떤 아가씨를 데리고 그를 찾아왔는데 그녀가 춘강의 편지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다첸은 편지를 읽으면서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의사는 그에게 퇴원을 하라고 했고 그는 바로 한국으로 달려갔다. 춘강을 다시 만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여러 해 동안 매년 시간을 내서 반드시 한번 한국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 사랑은 10년간 지속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더 이상 한국에 건너가지 못하였다. 다첸은 중일전쟁이 끝나고 춘강과 함께 합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천 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1939년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이렇게 하여 그의 한국여자와의 사랑은 끝나고 말았다.
1940년대 장다첸은 자비를 들여 둔황으로 갔다. 2년 7개월 동안 석굴벽화를 임모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돈황을 ‘예술의 보고’라는 것이 이때부터 중국인과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다첸의 화풍은 변화한다. 복필중색(復筆重色)을 좋아하고 고아하고 화려하며 말쑥하고 멋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림 속에 이백’이요 ‘오늘의 중국의 화선(畵仙)’이라고 했다.
그의 화풍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는다. 그의 화풍은 30세 이전에는 참신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며[清新俊逸] 50세에 들어서는 매우 아름답고 씩씩한 기세[瑰丽雄奇]였으며, 60세 이후에는 짙은 청색이 묵묵하고[蒼深淵穆], 80세 이후에는 기질이 순화되고 독창적 발묵 산수가 특별히 아름다워 천지와 융합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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